[영원] 수장, 호시 - 07

iamond 2016. 1. 14. 05:11


BGM :: waltz for ariah



38.

이것이 정녕 꿈이라면
언제야 깨어날 수 있을까.



39.

꿈을 꾸었다.
줄곧, 꿈을 꾸었다.

사내에게 안겨지는 꿈이었다.
제 뺨으로 닿아오는 숨결조차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 모르는 이에게 전신을 범해지면서도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다. 마냥 낯이 설다고만 생각했던 사내의 손길은 나날이 몸을 길들였다. 먹이를 주면 복종하는 축생처럼, 수치심도 모르고 사내의 남근을 집어 삼킬 때마다 비천한 몸뚱이는 점차 짓무르게 익어갔다.

마치 짐승의 교접 같은 행위가 몇번이고 몇번이고 숨가쁘게 되풀이 되는 꿈의 마지막에서, 원우가 보는 얼굴은 항상 같았다.

그것은─



40.

마치 꿈과 같은 일이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실현시키는 사내였다.

손을 뻗어 붙잡았다.
데일듯이 뜨거운 그의 체온. 닿는 것만으로도 살갖이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전신의 감도를 깨웠다. 쿵쾅, 쿵쾅. 필요 이상으로 고양된 맥박이 요동치는 소리가 귓가를 세차게 때려왔다. 말라빠진 허벅지를 벌려 잡고, 잔뜩 발기한 남근을 깊숙하게 받아 들인다. 흐윽, 제 작은 흐느낌에 응답하듯 더욱 크게 깊숙한 안쪽까지 꾸욱 짓눌러 들어온다. 천천히 뱃속 가득 뜨거운 불덩이가 틈샐 곳 없이 가득 이글거렸다.

실재한다.
그는, 여기에 있다.

뼈 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활짝 열린 전신으로 뜨겁고도 큰 그의 존재감을 상기(詳記)했다. 벅차도록 스며드는 그가 온몸 구석구석까지 훤히 새겨졌다. 마치 피부가 먼저 기억하고 갈구하는 듯한 온도의 체향이었다. 고개 숙여 제 목덜미로 얼굴을 묻어오자 흉부로 거친 숨이 뭉개졌다. 울부짖는 포식자에게 산 채로 뜯어 먹히는 듯 살점을 씹히며, 흔적을 새김 당했다.

너는 내 것이다,
그렇게 포고하는 입맞춤이 전신으로 못 박혔다.

그의 손이 원우의 이마를 쓸었다.
군데군데 굳은 살이 박혀 거친 손바닥이 뺨을 쓸며 내려가 곧 원우의 손으로 꼭 맞물렸다. 흐읍, 크게 꿰뚫리는 통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원우의 속눈썹으로 입술이 떨어졌다. 입맞춤. 마치 주신(主神)의 숨결과도 같은 뜨거움이었다. 전신이 타오르는 듯 했다.

이 감각을, 알고 있다.
눈밑이 시큰거릴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헐떡이며, 원우는 떠올렸다. 처음이되 처음이 아니다. 분명 기억에 남아있는 열기였다. 의식보다도 몸이 먼저 갈구하는 체온. 밭은 숨결을 꾹 내리누르며 손바닥 가득 휘감기는 그의 손을 가득 쥐었다.

"뜨, 뜨겁…습니다…."
"미안하다."

의미없는 사과였다.
거두시라 만류하려 했으나 달싹이는 입술은 다시금 먹혀 버렸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끊임없이 속삭이며 전신으로 속삭이는 입맞춤에 말문을 잃었다. 달았다. 산 열매 따위를 머금지 않아도 달아서, 언어를 잊은 듯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맞추느라 가까이 수그러진 이마로부터 흘러 내린 금색 머리칼이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꽃줄기에 매여 있던 것과 같은 머리카락이었다. 영겁의 연정(戀情)을 약조하는 꽃, 영원화(永遠花). 하얗게 살랑이던 꽃잎은 하룻밤 새 시들었으나 그 줄기에 꽁꽁 동여매진 머리카락은 여전히 태양 같은 금색이었다.

"…수장,"

천천히 손을 뻗어 그 빛나는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하룻밤이 지나도 여전히 금색으로 반짝일 터다.
그것만이 유일한 약조였다.

"……주십시오.."

이 몸이 오늘 밤 당신을 품었다는 증표를 제 안에 남겨 주십시오.
가득. 넘치도록 가득, 주십시오..

흐아앗!
단발마의 신음성을 끝으로 시야가 하얗게 튀었다. 푸욱,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이박힌 불기둥이 부르르 경련하며 꿀렁였다. 터져 나오는 하얀 탁액으로 스미는 그의 혼이 이 몸 안에 아늑하도록 서려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뱃 속을 채우고도 넘쳐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혼의 액체가 사타구니 사이로 질퍽하게 흘러 내렸다.

마침내 그를 가졌다.
그리고 그것은 원우가 줄곧 사로잡혀 있던 꿈의 연속이기도 했다.



41.

새벽의 끝에서야 겨우 잠든 원우는 왠지 모를 중압감에 슬쩍 눈을 떠올렸다.
무의식적으로 제 옆 자리를 더듬었으나 비어 있었다. 화들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자, 날카로운 음성이 사정없이 찔러 왔다.

"이제야 눈을 뜨는 게냐?"

한심하구나.
아침부터 날아드는 독설에 잠이 안 깰래야 안 깰 수가 없었다. 눈 앞에 선 자는 신관, 우지였다. 원우가 눈을 뜰 때까지 여태 이 자리에서 지키고 기다린 듯 심기가 불편한 기색을 만연히 드러낸 우지의 앞에 허둥지둥 머리를 숙였다. 예를 차려야 했다.

마을의 신관은 대신관의 직속이자 신성한 힘을 가진 자.
수장이 마을의 무게를 짊어진 우두머리라면 대신관은 신의 뜻을 받들어 전하는 목소리. 그들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우지는 차기 대신관 후보였고, 대신관의 대리인이었다.
원우 따위가 대면할 만한 이가 아니었다. 원우보다도 훨씬 작은 몸과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 지위에 걸맞는 위엄이 서린 우지의 날카롭고 예민한 시선 앞에 원우는 몸둘 바를 몰랐다.

"움직이지 마라."

짧고 명료한 말 한마디에 그대로 멈칫한 원우를 내려다 보며, 우지는 명령했다.

"다리를 벌려라."

신관의 앞에 다리를 벌리라니.
당혹감에 굳어진 원우를 짜증스럽게 째린 우지가 결국 몸소 손을 뻗어 원우의 양 무릎을 잡아 벌렸다. 가느다란 다리 사이로 허연 흔적이 낭자하게 남아 있었다. 양 엄지로 음습한 구멍을 벌리며 그 안에 가득 들어찬 탁액을 확인한 우지가 덧붙였다.

"오늘 하루 동안은 움직이지 마라. 안에 뿌려진 씨를 제대로 품고 있어야 한다. 날이 저물면 내가 다시 찾아와 의식을 마무리 지을 것이다."

아직 관례는 끝나지 않았다.
그대로 돌아서는 우지의 뒤에 황급히 여쭈었다.

"저어… 수장은 어디 계십니까?"

원우의 물음에 돌아본 우지의 얼굴은 냉랭했다.
그리고 그 눈빛보다도 한층 날카로운 음성이 돌아왔다.

"그것을 알게 된 들 너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냉정한 말이었다.
우지는 미련 없이 막사를 나갔고, 원우는 혼자 남겨졌다.

우지가 옳았다.
원우가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없었다. 수장을 뵈러 나설 수도, 수장이 있는 곳으로 찾아 갈 수도 없는 것이다. 관례가 모두 끝나기 전까지 오늘 하루 동안은 꼬박 누워 있어야 했다.

허나 고작 그런 말을 전하기 위해 우지 정도나 되는 고위 신관이 원우를 방문한다는 것은 이상했다. 아직 관례를 치른 일이 없는 원우였지만 신관이 쉬이 대면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더구나 우지는 차기 대신관이 될 몸. 신에게 올려지는 제(祭)를 주관하는 자였다.


‘형님은 몰라.’

도겸의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
후회하게 될 것이라 했다. 수장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했다.
어째서 그 말이 지금 생각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딘가 불안했다.

홀로 남은 침상을 뒤척였다.
간밤의 뜨거움이 무색하리만치 차게 식어 있었다. 비어 있던 자리를 어루만지던 손 끝에 문득 금색 머리카락이 걸렸다. 조심스럽게 주워 올렸다. 대신 남겨진 증표였다.

"…호시."

혼자 남은 자리에서야 겨우 불러보는 이름.
누구의 앞에서도 꺼낼 수 없었다.

신조차도 알지 못했으면 했다.
그에게 일찍이 송두리채 점령 당했다는 증표를.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 수장, 호시 - 09  (2) 2016.01.14
[영원] 수장, 호시 - 08  (2) 2016.01.14
[영원] 수장, 호시 - 06  (4) 2016.01.14
[영원] 수장, 호시 - 05  (4) 2016.01.14
[영원] 수장, 호시 - 04  (3) 2016.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