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수장, 호시 - 05

iamond 2016. 1. 14. 04:49




32.

꿈을 꾸었다.
질리지도 않고 꿈을 꾸었다. 같은 이름으로 시작된 꿈의 끝은 항상 같았다. 꿈 속의 원우는 수치스러움도 모르고 같은 사내에게 지배당했다. 그의 밑에 다리를 벌리고, 음낭 밑의 음습한 구멍을 열어 그의 남근을 품었다. 제 발목을 잡아 올려 깊숙히까지 쾅쾅 박혀지는 양물의 기세에 도리질을 치면서도 꾸역꾸역 물고 조여대는 하찮은 몸뚱이는 이미 저항할 의지를 잃은 지 오래였다.

안돼. 안돼. 안돼……!
말 뿐인 거절을 반복하며 활짝 벌려진 다리를 그의 허리로 감아댔다. 추하게도 발갛게 상기된 뺨을 하고 사내에게 범해지면서 제 양물은 발기했다. 왼 뺨을 매만지는 손끝이 데일듯이 뜨거웠다. 그 손이 닿는 부분마다 발갛게 열꽃을 피운 몸뚱이는 마치 이미 그 사내를 주인으로 섬기는 듯 열띠게 반응했다.

허억, 허억.
숨 돌릴 새도 없이 박혀 찔러지는 남근에 몇번이고 꿰뚫리며 달아오른 눈을 간신히 올려 떴다. 제 몸 위로 올라탄 사내의 길게 자란 앞머리가 수그려져 코끝에서 흔들거렸다. 태양 같은 금색 머리카락. 그리고 마주한 검은 눈이 꿰뚫듯이 바라보며 속삭였다.

너는 이제 내 것이다.

그 말 그대로였다.
꿈 속의 원우는 이미 그의 것이었다. 겁탈이 강간이 되고, 강간이 화간이 될 때까지 수도 없이 그에게 범해졌다. 마을의 관례를 거부하고 아직 혼례조차 치르지 아니한 몸으로 온갖 음탕하고 난잡한 행위를 일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일말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면, 원우는 진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야 했다.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것 자체가 수치였다.

꿈에서 깨면 다시금 필사적으로 비참함을 번복하는 스스로가 경멸스러워서.
죽고, 싶었다.



33.

수장은 불을 피웠다.
강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불을 피우고, 돌칼로 익숙하게 손질한 사슴 고기를 막대에 꽂아 올렸다. 타닥. 타닥. 피어오르는 연기에 점차 노릇노릇 익어가는 고기를 보면서도 전혀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도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와 핏발 선 그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먹어라."

잘 익은 살점을 찢어낸 수장이 고기를 건넸다.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며 받아 들었지만 아직도 피 냄새가 스치는 것만 같아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사슴 심장을 씹어 삼켰던 목구멍이 여태 울렁거렸다. 그렇게 고기 누린내를 맡고 있자니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아 두 눈을 질끈 감은 원우가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못 먹겠습니다."
"입에 맞지 않는 것이냐?"
"......."

대답할 말이 없었다.
고기를 먹어본 것이 대체 얼마만의 일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고기가 무슨 맛인지도 알 수 없었고, 냄새만 맡아도 메스꺼운 기분이 들어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 수장의 얼굴이 굳었다. 원우가 먹지 않으니 수장 역시 먹지 않고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풀숲을 헤치며 사라져 버렸다.

원우는 홀로 남겨졌다.
수장이 화를 내는 것도 지극히 당연했다. 이른 아침부터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갖을 애를 써주었건만 이제와서 먹지 못하겠다는 원우에게 질릴 만도 했다. 조용히 무릎을 모아 세워 얼굴을 묻었다. 흠뻑 젖은 옷은 아직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아 차갑고 축축했다. 등줄기가 오슬오슬 떨려왔다. 불가에 앉아 있어도 여전히 추웠다.

타닥. 타닥.
주홍빛으로 타들어가는 불꽃을 바라보는 원우의 가슴도 타들어갔다. 수장은 이대로 원우를 두고 떠난 것일까. 아랫입술이 다달다달 떨려왔다. 추워서 그런 것이다. 추워서. 추워서. 추워서.... 젖은 속눈썹을 조용히 떨던 원우는 축축한 옷 속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시들하게 말라버린 하얀 꽃.
물에 젖어 축 늘어진 꽃잎이 팔랑거렸다. 핑그르르, 천천히 꽃줄기를 돌리자 동여매인 금색 머리칼이 손끝을 굴렀다. 이까짓 꽃이 뭐라고. 왜 아직도 내버릴 수 없는 걸까. 왜 절벽으로 내던질 수도, 불 속으로 집어던질 수도 없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가슴 속이 울렁거렸다. 단지 고기 누린내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심했다.
이까짓 꽃을 꺾고자 까마득한 절벽을 기어 오르다 미련스럽게 목숨을 내버린 사내들도.
이까짓 꽃을 여태 내버리지 못하는 미련맞은 자신도.

모두, 한심했다.



34.

파슥, 풀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수장이었다. 어딘가 긴장한 기색으로 입술을 꾹 앙다문 수장의 얼굴을 마주하자 원우는 저도 모르게 소리없이 탄식했다. 파들 떨리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가 버린 줄, 알았다.
이대로 혼자 남겨진 줄로만 알았다. 그동안 줄곧 두려워했던 수장의 눈이 이토록 원우를 안도하게 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원우의 옆 자리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은 수장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먹을 수 있겠느냐?"

빨갛게 익은 산 열매.
원우의 품 속에 숨겨진 꽃과 함께 놓여져 있던, 바로 그 열매였다.

"…이것을 따러 가셨던 겁니까?"
"입에 맞았으면 좋겠구나."

세상에.
놀랍고도 당혹스러워서 차마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는 원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수장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것을 듣고 원우는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정작 자신은 배를 곯고 있으면서, 고기를 못 먹겠다는 원우를 위해 산 열매를 따 오는 이 사내의 미련스러움에 웃음이 났다. 무안하여 산 열매만큼이나 귀 끝이 발개진 수장이 원우의 벌어진 입새로 열매를 쑤셔 넣었다.

"알았으면 빨리 먹으란 말이다! 팔 떨어지겠다."
"푸흐, 죄.. 죄송.... 우읍."
"그만 웃어라!"

웃긴 걸 어찌합니까.
입 안 가득 틀어막힌 열매 때문에 그리 대꾸하진 못했으나 오므라 든 원우의 입술은 여즉 실실 쪼개고 있었다. 드물게도 양 뺨이 잔뜩 부풀어 올라 연신 오물거리는 원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수장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꼭 붕어 같구나."
"으븝-!"
"꼭꼭 씹어 삼켜라. 체하지 말고."

누가 붕어 같다는 겁니까.
키득거리느라 자꾸 벌어지는 입새로 붉은 열매 과즙이 주륵 흘렀다. 턱을 타고 하얀 목줄기까지 끈적하게 흘러 내리는 빨간 단물로 수장의 시선이 따라 붙었다. 집요하리만치 바싹 엉겨오는 수장의 눈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만 눈이 마주쳤다.

꿀꺽,
소리가 날 정도로 뻑뻑해진 목구멍에 얼추 씹은 산 열매를 반 정도 삼켜 넘기자마자 수장이 원우의 뒷목덜미를 잡아 끌어 입을 맞춰 왔다. 아직 덜 씹힌 과즙이 그대로 남아 있던 입 안으로 수장의 혀가 침입했다. 벌렁거리는 기도로 산 열매의 단내가 꿀렁거렸다. 달고, 뜨거웠다.

벌써 세번째였다.
왼 뺨이며 목줄기와 턱끝으로 진득하게 달라붙는 체온마저 익숙해졌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려 감으며, 이제는 보이지 않아도 이 혀를 그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손바닥의 열기에 연신 매만져지며, 수장의 손 역시 제 얼굴의 생김을 기억하지 않을까 생각하다 슬핏 웃었다. 그것이 무어 대수라고.

"잘…먹었느냐?"
"아뇨. 당신이 다 뺏어 먹지 않았습니까."

입술을 삐죽거렸다.
산 열매의 단내를 풀풀 풍기는 입을 떼자마자 제 걱정부터 하는 이 미련맞은 사내가 자꾸만 신경쓰였다. 신경쓰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 입을 맞추고 '미안'─ , 다시 입을 맞추고 '하구나'─ 속삭이며 정신을 쏙 빼놓는 짓거리에 숨이 거칠어졌다. 힘이 빠져 흐물거리는 몸뚱이를 품 안으로 기대며 물었다.

"왜 자꾸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열매 과즙이 번들거리는 수장의 입술이 내려 숙여지며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 끈적한 입술 자취가 달았다.

"모르겠다."

너는 나를 미치게 만드는 구나.
수장의 속삭임에 원우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려 감았다.

당신 역시도, 그러하다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 수장, 호시 - 07  (3) 2016.01.14
[영원] 수장, 호시 - 06  (4) 2016.01.14
[영원] 수장, 호시 - 04  (3) 2016.01.14
[영원] 수장, 호시 - 03  (2) 2016.01.03
[영원] 수장, 호시 - 02  (3) 201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