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수장, 호시 - 06

iamond 2016. 1. 14. 05:01


BGM :: waltz for ariah



35.

아주 먼 옛날, 주신(主神) 태양신이 땅으로 처음 내려왔을 적의 이야기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산마루를 밟고 내려온 주신은 그곳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며 환히 비추었다. 그러다 땅의 한 청춘(靑春)을 보고 첫 눈에 반하였다. 그 아름다움에 하루가 다 가는 줄도 모르고 마냥 바라보다가 날이 저무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는 구나.

주신은 열렬한 구애 끝에 봄을 품에 안았다.
주신의 뜨거운 열기를 품은 봄의 몸은 그 깊은 정을 미처 받아내지 못 하고 그대로 타서 재가 되었다. 상심한 주신이 그 주검을 꼭 끌어안고 몇날 며칠을 슬피 우니, 그동안은 해도 달도 뜨지 않았더란다.

주신의 눈물이 봄의 재를 적시자 한 송이의 꽃이 피었다.
봄의 살결처럼 하얗고 여린 꽃잎을 팔랑거리며 높디 높은 절벽 끝에서 가냘픈 줄기를 피워낸 꽃. 주신의 애모하는 이를 꼭 닮은 꽃이었다.

꽃으로 다시 태어난 청춘(靑春)이니 끝이 없는 영겁의 연정(戀情)을 그대에게 주리라.
주신은 그 꽃을 영원화(永遠花)라 불렀다.


……그래, 바로 저 절벽 끝의 하얀 꽃 말이다.



36.

"…정말입니까?"
"그래. 옛부터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저리도 높은 절벽인데... 어찌 그토록 많은 사내들이,"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중한 맹약(盟約)의 꽃이다."

영원화(永遠花)는 끝이 없는 영겁의 연정을 약조하는 꽃.
수장의 단호한 대답에 원우의 눈빛이 소리없이 흔들렸다. 원우는 고개 들어 눈 앞의 절벽을 하염없이 올려다 보았다. 저물어 가는 저녁놀 사이로 어렴풋이 하얀 꽃잎이 팔랑거렸다. 여태 주신의 미련이라도 걸려있는 듯 멀고도, 까마득 했다.

"연정(戀情)에 눈먼 사내에게 또 무엇이 보이겠느냐."

주신마저도 어쩔 도리가 없던 감정을, 하물며 인간 따위가.
한탄하고 자조하는 듯 웃어 넘기는 수장의 눈이 쓸쓸했다. 그래서 더욱 아무것도 묻지 못하였다. 소리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원우의 눈을 마주하며, 수장이 말해왔다.

"그저 네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주홍빛 저녁놀이 걸린 절벽 끝에 하얀 꽃잎이 팔랑거렸다.
가파르고 험준한 곳에서 가냘픈 줄기를 내리고 피워낸 꽃망울은 여리면서도 고고했다. 청초하고도 순결하다. 그런 아름다움마저 하룻밤이 지나면 볼품없게 말라 비틀어질 뿐이었다. 제 품속 깊이 감춰 두었던 그것처럼.

영원(永遠)을 약조하는 꽃조차도 결국 시들어 메말라 버린다.
끝이 없는 영겁의 공허만이 남을 뿐.

"아름답구나."

수장이 속삭였다.
올곧도록 향해오는 수장의 눈으로 주홍빛 석양이 어른거렸다. 집요한 시선. 하루가 다 가도록 머리 위를 끈질기게 내리 비추던 태양처럼 열렬하고 뜨거운 눈을 마주하며, 원우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름다운 것은, 바로 당신이라고.



37.

수장과 원우가 동구 기둥 앞에 다다르자 부락의 비상 봉화가 피어 올랐다.
횃불 여러 대가 올라왔고, 어수선하고 흉흉한 분위기 속에 보초대가 황급히 수장에게 보고했다.

"무슨 일이냐?"
"수장! 큰일 났습니다. 장로의 아들 하나가 탈주했다는 듯 합니다."

수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통금조차도 엄히 다스리는 마을에서, 탈주는 더욱 큰 중죄였다. 수색대는 발견 즉시 탈주자를 사살하는 것이 원칙이었을 정도로 탈주는 마을 공동체 모두를 배신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으며 특히 마을의 요직에 관련된 자의 경우 외부에 마을의 극비 정보를 빼돌릴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촌각을 다투는 시급한 사안이었다. 원우 역시 얼굴이 굳어졌다. 원우의 아비는, 장로였다.

"수장!"

원우의 아비가 수장에게 달려왔다.
다급하고도 긴박한 아비의 얼굴이 수장 뒤의 원우를 발견하자 일말의 안도와 실망이 뒤섞이는 걸 보며, 원우는 소리없는 탄식을 삼켰다. 아비의 뒤를 당연스럽게 따르던 도겸 역시 원우를 보고 책망과 한탄이 뒤섞인 복잡한 얼굴을 했다. 정말 싫은 순간이었다.

"수장께서 탈주한 제 아들놈을 잡아오신 겁니까?"

원우의 아비가 물었다.
이른 새벽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마을에서 나온 원우를, ‘탈주’ 한 것으로 여겼던 듯 했다. 평소 원우가 아비에게 얼마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수장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대답에 앞서 수장은 반사적으로 원우의 앞을 막아섰다.

"이 자는 탈주하지 않았다. 오늘 나와 함께 사슴 사냥을 했고, 의식을 치렀다."
"예? 사냥을 했단 말입니까? ..이 아이가?"
"그의 머릿가죽에 혈흔이 남아있을 것이다. 확인해 보아라."

수장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사슴을 보란듯이 그 앞에 내던졌다.
얼굴이 굳은 원우의 아비가 손을 뻗어 원우의 머리를 살피고 짐승의 혈흔이 아직 묻어 있음을 확인하였으나, 마을의 비상 사태에 미리 모여 있던 장로들 중 한명이 이의를 제기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수장. 성인식은 본디 축제 때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치러져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저자는 일찍이 사냥에 실패하고 낙오됐던…,"
"─닥치시오."

범과 같이 매서운 수장의 시선에 위압당한 장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수장은 안광이 형형한 눈으로 그 자리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빠짐없이 노려보며, 일말의 자비조차 없는 음성으로 똑똑히 못을 박았다.

"이 마을의 수장으로서 나의 권위를 걸고 주관한 의식을 감히 부정하다니. 이 자를 모욕하는 것은 곧 나에 대한 모욕이다."

수장이 그리 단언하자 더 이상 누구도 반문할 수 없었다.
원우의 아비만이 손을 내저었을 뿐이었다.

"허나 수장. 이 아이는 아직 관례조차 치르지 않았습니다."

관례.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못한 사내아이는 사냥에 나가기 전, 마을의 강인한 전사에게 다리를 벌리고 구멍을 열어 그 남근에서 뿜어져 나오는 씨를 받아내어야 하는 관례가 있었다. 이는 전사의 정액에 깃든 그 용맹한 혼을 육신으로 취하기 위함이었다. 원우는 아직 사내를 받은 경험이 없었다. 여태껏 사냥에 나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오늘 밤 이 자와 관례를 치르겠다."

수장의 말에 원우의 눈이 크게 떨렸다.
한 마을의 수장이 특정 부락민에게 이렇게까지 관여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더욱이 원우는 여태 마을의 사내 구실도 제대로 못 하고 있던 낙오자였다. 원우의 아비도, 그 뒤에 있던 도겸도 경악했다. 말문이 막힌 나머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던 원우의 아비가 반문했다.

"수장께서 이 아이에게 그토록 마음을 쓰시는 연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황망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원우의 아비 뿐만이 아니었다. 원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 한 날 동안 수장과 시간을 보내면서도 수장의 속뜻을 알 수 없었다. 황송스러울 정도로 각별한 수장의 배려를 받으며 때로는 놀라웠고, 때로는 당혹스러웠고, 때로는 아찔했다. 그럼에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답답했고, 초조했다. 대체 왜. 어째서. 나 같은 것, 따위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을 남기고 수장은 돌아섰다.
알 수 없는 대답의 뒤로 먼저 막사로 들어가 버리는 수장의 귀는 은근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원우 역시 그 홍조가 옮겨 붙기라도 했는지 얼굴이 화끈거리던 와중, 아비의 한숨과도 같은 시선과 마주쳤다.

"수장에게 안길 셈이냐?"
"모르겠습니다.."
"한심한 놈."

혀를 차며 아비 역시 돌아섰다.
줄곧 그 뒤를 지키고 서 있던 도겸과도 마주쳤다. 심란한 감정들이 뒤엉킨 얼굴의 도겸은 복잡한 눈빛으로 원우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훅 끌려 내려진 원우의 귓가에, 목소리를 낮춘 도겸이 은밀히 속삭였다.

"안돼."

저 치를 가까이 해서는.. 안돼, 형님.
전에 없이 잔뜩 긴장한 도겸의 경직된 눈에는 일말의 두려움마저 엿보였다. 언제나 느물거리는 웃음이 걸려 있던 도겸은 평소의 장난기가 싹 가신 얼굴로 원우를 마주했다. 짧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도겸이 수장의 막사를 흘낏 살피더니, 속삭이듯 덧붙였다.

"형님은 몰라."

후회하게, 될 거라고.
으름장을 놓는 도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무엇을 모르고 있다는 것인지, 어째서 수장을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저보다 어린 동생, 그것도 첩의 소생이었지만 평소 도겸의 말에 제대로 대답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원우였다.

"..후회는 충분히 했어."

원우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도겸에게 반박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가느다란 눈을 크게 치켜 뜨는 도겸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후회라.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더 실망할 것도, 후회할 것도 남아있지 않은 삶이었다.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이제 와서.

원우는 제 발로 수장의 막사를 향했다.
오늘 밤, 그에게 안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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