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waltz for ariah
42.
수장은 특별했다.
마을의 그 누구도 갖지 못한 능력을 가진 자.
마을의 그 어느 사내보다도 강대한 능력을 가진 자.
마을의 신관으로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신의 후계로 선택받은 자였다.
43.
"찬이라 합니다."
신관님께 원우님의 몸을 돌보아 드리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렇게 말한 찬은 깨끗한 물을 떠 와 깨끗한 천으로 원우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 주었다. 이른 아침부터 다녀간 신관 우지의 분부대로 하루종일 누워만 있느라 몸이 쇠한 원우는 찬의 시중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어찌나 기력이 쇠했던지 발가벗은 몸으로 찬의 앞에 누워있으면서도 수치보다는 상쾌함이 앞설 지경이었다.
"원우님.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배가 조금... 아픈데.."
"관례를 치를 때면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다른 곳은요?"
"배가 조금... 고픈데.."
"의식이 모두 끝날 때까지 곡기를 끊으셔야 하니 어쩔 수 없습니다."
예의 바른 말씨로 모든 불평을 차단하는 찬의 대답에 원우도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어린 나이에 비해 찬의 말주변이 예상 외로 좋았던 것도 있었지만, 실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조차 까마득할 정도로 너무나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에 ‘님’ 까지 붙인 이는 찬이 처음이었다.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너도 관례를 치른 적이 있어?"
"예. 영광스럽게도 수장님께 받았지요. 저뿐만 아니라 신관 된 이는 대부분 그렇습니다."
덤덤하게 대답하며 원우의 몸을 닦아 주는 데에 전념하는 찬을 보자 원우는 다시금 할 말을 잃었다. 어린 나이에도 익숙하게 의식을 돕는 찬이 여태까지 본 알몸이 비단 원우 하나만의 것은 아닐 터였다. 그리고 수장이 안았던 사내도 원우 하나밖에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비록 애초부터 자신 따위가 감히 독점할 수 있는 사내가 아니라 하여도.
"근데.... 왜 나한테 원우 ‘님’ 이라고..."
"관례를 치르고 나면 저 뿐만 아니라 마을의 다른 이에게도 존경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모두가 원우님께 예를 갖출 것이니, 자신을 가지십시오."
원우는 의아했다.
관례를 치른다고 해서 그동안 자신을 바라보던 가족들이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달라지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자신보다도 나이가 어리지만 확신에 가득 찬 찬의 당당한 말씨에 수긍하면서도 묘하게 찜찜했다.
수장과 ‘관례’ 를 치른다는 것의 의미를, 원우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44.
수장에게는 대신관으로부터 내려진 새 이름이 부여된다.
태어날 때 붙여진 아명(兒名)은 잊혀지며, 마을의 그 누구도 불러서는 아니 된다.
수장으로 추대된 이에게 자유는 없었다.
그 존재만으로 이미 마을의 이름을 대변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45.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제물’ 이 아닙니까. 수장이라 해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마을의 수장이 신께 바쳐진 ‘제물’ 을 탐하다니!
장로들이 앞다투어 탄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수장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동안 어린 풋내기를 수장의 자리에 앉혀놓고는, 좋을대로 권력을 휘둘러 왔던 늙은 족제비들의 속셈쯤은 훤히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지겹도록 익숙했다. 그들이 떠앉혀 놓은 자리에서 모두가 원하는 ‘수장’ 으로서 살아가는 삶이란.
‘호시’ 라는 이름을 받은 후 단 한번도 제 의지대로 살았던 적이 없었다.
마을의 모든 이들이 보는 자리에서 원우와 관례를 치르겠다 선언한 것은, ‘호시’ 의 첫 의지였다.
"나는 수장이다."
그대들의 손으로 선택된 자, 신의 후계로 인정받은 몸.
신께 바쳐진 ‘제물’ 은 곧 나를 위해 바쳐진 것이 아닌가.
"내가 ‘호시’ 니까."
나를 위해 마련된 ‘내 것’ 을 취했을 따름이라고.
수장 ‘호시’ 는 말하였다.
46.
장로들과의 긴 회의를 마치고 자리를 빠져나오자마자 수장은 비틀했다.
다리가 풀릴 뻔 하였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수장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손가락 새로 보이는 땅이 어지럽게 울려댔다. 온몸의 피가 끓었다. 목구멍이 바싹바싹 말라 왔다. 전신의 혈관이 꿈틀꿈틀 용트림 하는 듯이 떨려와서, 수장은 점점 가빠지는 호흡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수장! 괜찮으십니까?"
"-다가오지 마라!!!"
수장의 이상 징후에 기겁한 보초가 다급하고 단호한 명령에 그대로 멈춰섰다.
수장은 떨리는 몸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메슥거리는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도 만나서는 안 되었다. 아무도 이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되었다. 전신이 비명을 지르는 듯 했다. 감당이 되질 않는 다리를 끌고 다다른 곳은 원우의 막사였다.
여태 찬의 시중을 받으며 발가벗은 몸이 닦여지고 있던 원우는 문간의 수장을 보고 놀란 나머지 그대로 상체를 일으키려다 찬에게 저지 당했다. 원우를 보자마자 긴장이 풀린 수장은 그대로 쓰러지듯 원우의 앞에 널브러졌다. 수장의 바들거리는 손이 힘겹게 원우의 손목을 움켜 잡았다.
"수장님!"
"손 대지 마라! 나가! 나가라고!!!"
놀란 찬이 수장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수장은 맹렬히 거부했다.
마지막 남은 악으로 원우의 시중을 들던 신관들, 보초를 서던 이들까지 모두 물린 수장은 간신히 몸을 끌어 원우의 어깨로 얼굴을 박았다. 발가벗은 원우의 식어빠진 살갖에 수장의 달구어진 숨이 뭉개졌다. 마른 품에 감긴 눈가를 비비며, 거친 호흡을 토해내는 수장의 몸은 꼭 불덩어리 같았다.
원우는 당황스러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여태 마음에 담아 두던 수장의 안위를, 신관에게조차 듣지 못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나타난 수장이 주위를 모두 물리고 원우를 찾아왔다.
수장은 상처입은 짐승처럼 잔뜩 고양되어 불안정한 상태였다.
타인의 손길을 경계하고 거부하면서, 원우만을 갈구했다. 허억, 허억. 새된 호흡소리. 무어라 말을 뗄 새도 없이 거친 숨을 허덕이던 수장은 원우의 몸 위로 올라타 양 손목을 잡아 누르며 속삭였다.
"……미안하다."
울 것 같은 눈이었다.
눈물 한 줄기 맺혀 있지 않았지만 꼭 그렇게 보여졌다. 아무 말도 못 들었어도,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훤히 보여지는 감정이 그대로 다가왔다. 그 눈을 마주하자 수장에게 양 손목이 붙들린 채로 눕혀진 원우는, 울컥했다.
"...왜 자꾸 사과하는 겁니까."
미안하다는 말.... 듣기 싫습니다.
꼭 버려질 것 같아서, 또 배신당할 것 같아서.
싫어요. 싫다고….
버림받는 것은 사람 마음이 변하는 것 만큼이나 한 순간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원우 역시 필사적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 무엇도 알려 하지 않았었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는 시간들을 보내왔다. 자꾸만 작아지는 스스로를 자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저를 한없이 처절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자신조차 주체할 수 없이 이끌리는 이 감정을─
"..당신을 원해요."
그러니까, 미안해 하지 마요.
내가 원한 거니까. 내가 당신을……
달싹거리던 입술이 그대로 포개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수장의 혀가 뒷말을 모두 삼켜 버렸다.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먹어 치울듯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맥박치는 혀끝에서 맴도는 호흡이 대신 속삭였다. 내가, 너를. 원우의 양 손목을 움켜쥔 손아귀의 떨림이 점차 사그라 들었다. 길게 떨어진 수장의 혀가 하얀 목덜미를 핥았다. 그리고 입술을 묻으며,
"…너 뿐이다."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건, 너 뿐이야.
가라앉은 한숨처럼 속삭이는 수장의 입술이 깊숙하게 살을 씹었다.
떨림이 멎었다.
모든 것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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