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waltz for ariah
47.
"의식은 금방 끝이 난다."
신관 우지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지는 원우의 발가벗은 전신에 먹과 안료를 풀어 고대 신어(神語)를 새겨 그리고 있었다. 안료에 적신 우지의 차가운 손끝이 유연하게 온몸을 매만졌다. 우지의 지시를 따라 작은 절구를 두고 말린 꽃잎을 빻던 찬이 그것에 불을 붙여 향을 피웠다. 눈앞의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짙게 피어오르는 향을 등진 우지가 원우의 마른 다리를 잡아 벌리었다. 그리고 두 손가락에 신성수를 듬뿍 적셔, 수장의 혼으로 질퍽거리는 구멍을 단숨에 꿰뚫었다.
"지금까지의 너는 지워지고, 새 영(永)을 얻으리니."
모든 업(業)이 지워지고, 신의 권능을 받으리라.
…흐헉. 진득한 뱃속으로 꽉 들어찬 첨단이 다시금 단번에 뽑혀 내지자 원우는 밭은 숨을 내질렀다. 경련하는 마른 배는 우지가 직접 새긴 고대 신어가 큰 원의 모양으로 둥글게 공백을 두고 빽빽히 새겨져 있었다. 혼을 찌른 우지의 두 손가락이 원우의 배를 세로로 주욱 그었다. 허억, 허억. 핏발 선 목으로 거칠게 호흡하는 원우의 이마에 손을 얹은 우지가 조용히 두 눈을 감기었다.
"잠들어라, 아이야."
숨이 사그라들었다.
마른 꽃잎에서 피어 오르는 향이 폐부의 깊숙이까지 스며들자 원우의 떨림도 멈추었다. 묘하게 코끝에 익은 향이었다. 수장의 체온만큼이나 익숙하고, 그리운 향기. …아, 이것은.
감긴 시야로 흩날리는 하얀 꽃잎의 잔상을 마지막으로, 원우는 잠이 들었다.
48.
따사롭게 얼굴을 찔러오는 아침 햇살에 원우는 눈을 떴다.
조용히 눈가를 찡그리던 와중 밝고 쾌활한 목소리가 먼저 쨍쨍하게 울려 왔다.
"형!"
형, 이제 그만 일어나. 아침이야!
살며시 실눈을 떠올리자 어린 막내 남동생이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옷깃을 꾸물대고 있었다. 형, 빨리 가서 아침 먹어야지. 다들 기다리고 있어. 침상 밖으로 손을 잡아끄는 아우에게 못 이겨 터덜터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비와 도겸은 이른 새벽 나간 듯 했고, 상 앞에는 원우의 어미와 어린 동생들이 앉아 원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가족이었다. 아직 출가하지 않은 누이들은 어느 덧 처녀 태가 나는 얼굴로 원우에게 웃음짓고 있었다.
"얘야, 이젠 다 되었다."
사흘이나 일어나지 않아서 다들 걱정했단다. 이젠 다 된 게야. 다 되었어..
어미는 원우의 마른 팔뚝을 쓸어 내리며 발개진 눈가로 눈물겹게 원우를 다독였다. 집에 남은 누이들 중 가장 원우와 나이가 가까운 누이동생은 거의 울먹일 듯 했다.
자, 어서 먹자꾸나.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차렸단다.
그렇게 말하는 어미의 아침 상에 올라온 것들은 모두 원우가 평소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고기 반찬이었다. 귀한 마른 생선까지 올라와 있었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따듯한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식욕이 돌지 않았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곡기를 끊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어미가 원우의 입맛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가물했다. 얼마 만에 먹는 어미의 밥상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을 가족들과 단절되어 살았던 것이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평소 원우의 얼굴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던 식구들이었다. 어머니의 갓 지은 아침 상, 가족들의 따듯한 환대. 원우를 중심에 두고 펼쳐진 이 아늑한 분위기 속에 섞여들 수 없는 것은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원우 뿐이었다.
그럼에도 어미를 비롯한 동생들의 독촉에 마지못해 상 앞에 앉은 원우는 그들이 권하는 것들을 입에 대었다. 입맛이 변한 것인지 맛있다는 느낌보다도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이 자꾸 차올랐다. 이런 것보다도 달작하고 산뜻한 산 열매를 먹고 싶었다.
수장이, 보고 싶었다.
49.
"수장은 마을에 안 계십니다."
"그럼 밖에 계시나요?"
"모릅니다. 잠시 나가셨겠지요."
수장의 막사를 찾았으나 장정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원우는 왠지 모를 미련이 남아 그 앞을 서성였다. 안에 수장이 없는데도 빛 한줄기 들어갈 틈도 없이 봉쇄된 막사 앞을 보초들이 지키고 있다. 무언가 수상했다. 허나 심증 뿐이었다.
"언제부터 안 계셨습니까?"
"한 사흘 전……"
"여보게!"
"아니, 모릅니다. 자꾸 여기 계셔도 더 드릴 말이 없으니 이만 가시지요."
무의식적으로 원우에게 대답하던 보초에게, 옆의 장정이 눈치를 주자 급히 하던 말을 뚝 멈추었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상황이었지만 이들이 입막음을 당했다면 더 물어도 소용없을 것이었다. 짧게 목례를 한 원우는 마지못해 발 걸음을 돌렸다.
사흘 전이라면, 원우가 관례를 치른 후 일어나지 못했던 시간과 같다.
제가 의식을 잃었던 시간 동안 수장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흘 동안이나 마을 밖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면, 무언가 심각한 위험에 빠졌을 지도 모른다. 헌데 어찌하여 마을의 수색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골몰히 생각에 잠긴 원우의 등 뒤로, 누군가가 어깨를 돌려 세웠다.
"형!"
"…승관이?"
"그래, 나 승관이야. 형 얼굴 보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얼굴이 아주 반쪽이 됐네. 고생 많이 했다보다."
도겸의 동무 승관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일찍이 원우와도 안면이 있었던 승관은 지난 몇 년간의 공백에도 아랑곳 않고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살갑게 말을 붙여왔다.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 여전히 둥근 얼굴에 모난 데 없는 승관을 보자 원우도 조금 마음이 녹았다.
"지금부터 애들이랑 사냥 나갈건데. 형도 같이 갈래?"
사냥.
들짐승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운 원우로서는 썩 반가운 제안은 아니었지만, 사냥을 나간다는 명목 아래 마을 밖을 나갈 수 있다면 수장을 찾으러 갈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별 소득이 없을 지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갈게. 사냥."
지금의 원우에게는 들짐승에 대한 공포보다도 수장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
그만큼 수장을, 보고 싶었다.
50.
승관은 세 명의 동료들과 함께 나타났다.
오늘의 목표는 멧돼지라 했다. 이 정도 인원이 있으니 그 쯤은 잡아야 면이 서지 않겠냐며 큰 소리를 치는 승관에게, 원우는 조용히 첨언했다.
"굳이 힘을 쓸 필요는 없어. 어느 길을 다니는지 파악하고, 함정을 파 두면 돼."
그리고 우리는 조용히 잠복하며 상황을 지켜 보는거야.
논리정연한 원우의 말에 승관을 비롯한 동료들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지만, 일찍이 수장에게 배운 대로 덫을 설치하는 원우의 솜씨에 크게 감탄하여 어느 새 원우를 형님이라 부르며 우대했다. 그들은 수장이 원우에게 일러주었던 것과 같은 사냥법을 알지 못했다.
수장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읊을 뿐인데도 동료들은 원우에게 감복하였고, 승관은 원우와의 친분을 자랑스러워 하며 의기양양했다. 저를 두고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라 원우는 조금 의아했다. 승관을 비롯하여,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지난 시간 동안 원우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붙여준 적이 없던 것이다. 허나 이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부락민이 모두 그러하였던 데다 지금은 이리 융슝한 대우를 해 주고 있으니 원우는 새삼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우를 어찌나 높이 평가하였던지, 대략적인 방법만 알려주고 그들을 잠복시킨 뒤 잠시 자리를 이탈하겠다 말했을 때에도 형님 빨리 다녀오시라며 웃는 낯으로 보내주었을 정도였다. 그들에게서 빠져나온 원우는 주위를 둘러 보며 혹시 이전에 수장과 지났던 길이었는지 살펴 보았다. 혼자서 이 드넓은 숲을 샅샅이 뒤진다는 것은 무리였지만, 힘듦을 분간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원우는 애초부터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51.
수장! 수장.... 어디 계십니까.
이제 해가 기울고 있었다. 긴 시간 동안 동료들에게 돌아가지 않았지만 대충 길을 잃었다고 둘러대면 될 것이었다. 오래 걸었던 다리가 후들거렸다. 버틸 수 있을만한 체력이 못 되는데도 원우는 오기를 부렸다. 언덕을 몇 개를 넘었는지 기억이 가물했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조차 아득할 지경이었다.
수장.... 수장.
허억. 그대로 무릎이 꺾여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파슥, 풀숲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었다. 그르렁 대는 맹수의 숨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왔다. 뒤를 돌아 보았다. 곰이었다.
‘저 언덕 너머에는 곰이 사는 굴이 있다.’
수장의 말이 어렴풋이 스쳤다.
정신없이 헤매던 와중 곰의 서식지까지 와 버린 것이 분명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곰을 마주했음에도 주저앉은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언젠가 집채만한 멧돼지를 마주했던 순간처럼. 일곱살 때와 다를 바 없는 높낮이에서 올려다 보는 곰은 원우를 작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단 한번의 움직임으로 원우의 목덜미를 끊어놓을 육중한 발톱과 거대한 몸집을 바라보며, 원우는 다달거리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죽는 걸까.
죽음은 원우가 그토록 그려왔던 마지막이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고 여겨왔던 하찮은 삶을 마침내 끝내게 될 그 순간만을, 여태껏 간절히 기다리지 않았던가.
…싫어.
몇 번이나 죽임 당할 뻔 했고, 몇 번이나 스스로를 죽이려 하였으며, 셀 수도 없이 죽음을 바라왔던 원우는 지금 죽음을 부정했다. 이제 와서. 죽고 싶지, 않아졌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죽을 수 없었다.
커다란 앞발이 원우의 위로 드리웠다. 두 눈을 꾹 감았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타앙.
둔탁한 돌이 세차게 날아와 곰의 머리에 명중하자 으득 하고 두개골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났다. 돌팔매였다. 제 무릎 앞까지 데구르 굴러 떨어진 돌을 망연히 내려다 보았다. 심장이 터질듯이 크게 뛰었다. 이런 감각을, 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또 다시 돌팔매가 날아와 곰의 머리를 가격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돌팔매가 날아와 원우의 발치로 데구르르 굴러 내렸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곰의 목덜미로 단숨에 날붙이를 꿰 뚫어 따 버리자 원우에게로 뜨거운 피가 와락 쏟아졌다. 울부짖으며 쓰러진 곰의 꿈틀대는 사체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장……"
호시,
바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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