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수장, 호시 - 10

iamond 2016. 1. 15. 12:29


BGM :: waltz for ariah








52.

옛부터 마을에는 남다른 신체 능력을 지닌 사내아이들이 태어나곤 했다.

누군가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며,
누군가는 바람을 타고 실려오는 만물의 냄새를 구별하는 코를 가졌고,
누군가는 천 리 밖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기도 하였으며,
누군가는 집채만한 곰과 겨루어도 이길만한 완력을 지니었다.

그 중 마을의 신관으로부터 신의 후계(後繼)로 떠받들어 질 만한 비범함을 인정받은 자는 ‘수장’ 으로 추대되었다.



53.

"......"

바로 그였다.
해질 녘의 어둑한 진홍빛 석양 아래 흔들리는 머리칼은 특유의 금색이 퇴색(退色)되리만치 새빨간 피를 흠뻑 뒤집어 쓴 모습이었지만 원우는 그를 똑똑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호시.
원우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사내였다.

붉은 선혈이 번진 눈가로 묵묵히 원우를 내려다 보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피로 얼룩진 손에 쥐여진 날붙이에서 똑 똑 떨어진 핏방울이 들판을 적시었다.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대지의 귀곡성처럼 울려 대었다.

이내 핏물젖은 눈을 떨군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이대로 말 없이 떠나려 하는 그를, 붙잡았다. 무거운 침묵 끝에 튀어나온 원우의 음성은 처절하게 갈라져 쉬었다.

"수장! 왜… 내 목숨을 구했습니까. 왜 이렇게 나를 살려 놓고, 또 다시 모른 척 떠나 가려는 겁니까. 그동안 내가 죽을 뻔 할 때마다 지겹도록 나를 구해낸 사람이 당신임을.... 내가 모르는 줄 아시는 겁니까?"

원우는 품 안을 뒤져 다 말라빠진 꽃줄기를 꺼내 보였다.
본래의 흰 꽃잎도, 싱싱하던 초록빛도 모두 퇴색되었으나 그 꽃줄기에 동여매인 금색 머리칼만은 또렷했다. 원우를 지키기 위해 죽인 곰의 피에 가리워진 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여전히 돌아보지 않는 그에게, 원우는 토로했다.

"돌팔매로 나를 구해준 것도,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나를 건져 놓았던 것도, 그 강가에 내가 돌을 모아 놓을 때마다 산 열매나 꽃을 꺾어다 준 것도 다 당신이지 않습니까!"
"........"
"진정 몰랐던 겁니까? 내가 지금까지 줄곧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원우의 음성 끝이 젖어 들었다.
그간 죽은 듯이 집 안에만 유폐되어 살아야 했던 원우가 남 몰래 마을을 빠져 나와 강가를 서성였던 것도, 돌에 그림을 새기며 시간을 끌었던 것도, 그 돌을 모아 근처에 쌓아 두었던 것도 전부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원우 따위의 존재가 감히 한 마을의 ‘수장’ 을 뵐 수 없었을 것이기에.

"…나는 너를 만날 수 없다."

나는, 네 얼굴을 볼 자격조차 없는 놈이야.
그러니 나를 기다리지도 말고, 나 같은 놈 때문에 울지도 마라.
나와 엮일수록 네가 불행해질 뿐이다.

그대로 멀어지려는 그의 뒷모습에 입술을 잘근 깨문 원우는 힘이 풀렸던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비틀비틀 달려 나갔다. 그리고 뒤에서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 안았다. 비릿한 피가 흥건한 어깨에 얼굴을 묻자 원우의 창백한 살갖도 붉게 물들었다. 피비린내가 흠뻑 밴 그의 체취가 폐부까지 들이찼다. 질끈 감은 눈두덩에서 흐른 뜨거운 눈물이 잔근육으로 단단한 어깨를 적셨다. 데일듯이 뜨거운 체온. 원우가 언제나 그리워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당신이 나를 살게 하니까."

오직 당신만이, 내 존재의 이유.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날붙이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원우에게 안긴 채로 피에 젖은 제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 보던 그는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손으로는 너를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다. 그렇게 여기던 손바닥으로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비.
해가 저물고 비가 내려와 세상을 덮었다.

한두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 비는 점차 굵어져 피를 씻기었다. 붉은 물이 뚝 뚝 떨어지며 점차 본래의 살갖이 드러나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 보던 그는, 제 몸으로 둘러진 원우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겹쳐 쥐었다. 차게 식은 체온으로 미비하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원우의 손을 떼어내고 돌아 선 그는 원우의 목덜미를 잡아 내려 이마에 이마를 맞추었다. 열이 올라 있었다.

"…이러다 병이 나겠구나."

머물 곳을 찾아보자.
그리고 급히 잡아 끄는 손길에 비틀거리자 망설임 없이 저를 업어 들고 성큼성큼 빗 속을 뛰어가는 그를 보며, 원우는 조용히 웃었다. …이런 사내에게,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꼭 끌어 안은 그의 뒷덜미에 살풋 얼굴을 기대는 원우였다.



54.

‘수장’ 은 마을을 수호하는 신(神)의 대리인이자, 마을의 무게를 짊어지는 하나의 이름이었으며, 주신(主神)을 상징하는 태양 그 자체였다.

부락민들은 모두 ‘수장’ 을 따르고 경애(敬愛)하는 한편으로 경외(敬畏)하였다.
이는 ‘수장’ 이 지닌 비범한 힘이 마을을 지키는 방패가 되었던 동시에, 마을을 위협하는 창으로 돌변할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5.

이곳 지리를 훤히 꿰고 있던 수장은 원우를 들쳐 업고도 금세 비를 피할 만한 동굴을 찾았고, 동굴 안의 마른 나뭇조각과 부싯돌을 불씨 삼아 불을 피워 내었다. 그리고 원우를 불가에 앉혀 놓고는 차게 식은 원우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입김을 호오 불었다. 그러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원우의 눈과 딱 마주치자, 이제 와서 조금 머쓱해졌는지 조심스럽게 손을 놓아 주려다 원우에게 옷깃을 붙잡혔다.

"왜 내 눈치를 보는 거죠?"
"…열이 아직 내리지 않았다."
"더한 짓도 했던 주제에."

반박할 수 없는 일침에 애꿎은 귀끝만 벌겋게 달아오른 그에게, 원우는 가늘게 뜬 눈을 은근히 흘겼다.

"떠 먹여 주는데도 못 먹으면 바보예요."
"..상관 없다. 그보다는 네 몸이 더 중하지 않느냐."
"싫음 말아요."

새침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원우의 손은 여즉 수장에게 붙잡혀 있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 원우의 옆얼굴을 보며 애가 타는 듯 애꿎은 손만 꼼질거리다, 마지못해 시인한다.

"....싫다고는, 안 했다."
"흥."
"그러지 말고 이리 가까이 와라. 몸을 녹여야 할 것 아니냐."
"싫어요."

고집스레 입술을 삐죽거리는 원우를 빤히 쳐다보던 수장이 이내 원우의 몸을 와락 끌어 안고 냅다 누워 버리길 강행했다. 이 와중에도 혹여나 원우의 살에 돌이 배길까봐 제 몸 위로 눕힌 수장은, 꼭 밀착한 목뒷덜미를 쓸어 내리며 자상하게 보듬었다. 그러면서도 살짝 떨리는 뜨거운 손끝을 알자 원우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 가슴에 얼굴을 꼭 파묻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따듯했다.

"…너는 정말 나를 미치게 만드는 구나."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수장의 눈을 마주했다. 제가 위에 올라 타 있음에도 마치 쏟아져 내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까만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원우는 이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쪼옥, 느릿하게 맞닿고 아련하게 멀어지는 입술이 아쉬워 다시 한번 입맞춤을 했다. 쪼옥, 부벼지는 입술이 채 떨어지기 전에 붙잡혀 더욱 깊숙하게 먹혀졌다.

옭아매듯 꼭 끌어안은 수장의 품에 단단히 갇힌 채로 입 안을 범해졌다.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집요한 혀끝에 순순히 매달렸다. 숨막히게 달았다. 여전히 코끝을 찔러오는 비릿한 피 내음과 전신을 흠뻑 적신 비 냄새가 맴도는 데도 그의 혀끝으로부터 어렴풋이 산 열매를 느꼈다. 원우가 줄곧 원해왔던 바로 그것이었다.

"먹고 싶어....."

더, 더 줘요. 당신을, 더 가득 줘요.
뜨겁게 맥박치는 중심부를 비비며 그의 몸 위에서 다리를 벌렸다. 수장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원우의 허리를 잡아 내려 맞닿은 곳을 바짝 밀착시키며, 다시금 원우의 입술을 먹어 삼켰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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