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장, 호시 1부 11편에서 이어짐 *
BGM :: waltz for ariah
1.
강한 수컷은 존경받는다.
들짐승을 수렵하여 제 식솔들을 먹이지 못 하는 사내는 배척 받고, 버림 받는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했으며, 사냥하지 못 하는 사내는 ‘사내’로 인정받지 못 하기 때문이다.
2.
그리고 이는 더 이상 원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3.
원우는 덫을 놓았다.
사슴을 잡을 덫의 매듭을 짓는 원우의 손끝은 꼼꼼하고 다부졌다. 이런 단순한 매듭 정도는 눈 감고도 잡을 수 있을 만큼 손에 익은 모양새였다. 원우는 이 방면으로 또래의 젊은 사내 아이들보다도 월등한 기술을 갖추게 되어, 이제는 원우에게 덫을 놓아 달라고 부탁하는 처사가 빈번해질 정도였다. 원우는 젊은 무리에서 꽤 인정받고 있었으며, 그들은 원우를 형님으로 모시며 앞 다투어 사냥에 함께 나가자고 권유했다.
“형님! 다 됐으면 얼른 오셔!”
승관의 부름에 씩 웃은 원우는 곧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파슥,
풀숲에 스치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태생적으로 마른 체질인 탓인지 무리의 젊은 사내들보다 얇고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전보다 잘 먹고 많이 움직이는 생활 덕에 확실히 근육이 붙었다. 하루 종일 산과 들을 쏘다니며 살갖이 그을려져 훨씬
밝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저 앞에서 무리들이 오늘 잡은 꿩을 굽고 있었다.
커다란 사내 놈들이 시장하다며 달려들고 있으니, 빨리 가지 않으면 금새 뼈 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걸음을 재촉하던 원우는 그만 미처 보지 못한 나무 뿌리에 발을 헛디뎠다.
“으앗…!”
그대로 고꾸라질 뻔 한 원우의 허리춤을 잡아챈 팔뚝에 덥썩 안겨졌다.
민규였다. 같은 무리에서도 체격이 좋고 건장하기로 알려진 장정에게 와락 안긴 원우는 일순 놀란 눈을 깜박이다가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돌처럼 단단한 가슴팍이었다. 민규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흐트러진 원우의 머리에 붙은 풀잎을 떼어 주었다.
“..고마워.”
“이러다 쟤들 다 먹겠다. 얼른 가요, 형님.”
자연스럽게 원우의 손을 잡아 쥔 민규가 뛰었다.
가볍고 빠른 뜀으로 순식간 고지에 다다른 민규가 싱긋 웃으며 제 옆자리에 원우를 앉히곤 불 위의 꿩 다리를 으득 뜯어냈다. 늦게 와선 다리부터 탐낸다며 구박을 한 몸에 받은 민규는 아랑곳 않고 태연히 원우에게 꿩 다리를 내밀었다.
“아니 괜찮은데...”
“에이 무슨 소리. 형님이 우리 중에 제일 연장자니까 무조건 다리 드셔야죠.”
“맞아. 민규는 안 되지만 형님은 돼.”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형님!”
아우들의 아우성에 마지못해 받아 든 원우가 조금 멋쩍은 얼굴을 했다.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육즙이 줄줄 흐르는 꿩 다리를 잘근 앞니로 뜯었다. 원우가 고기를 입에 대기가 무섭게 불 위의 꿩을 향해
달려든 수 개의 손이 육결을 절단냈다. 연장자가 먼저 먹은 후에야 비로소 음식을 입에 대는 것은 무리의 젊은이들이 원우에게
보이는 존경의 의미였다. 이렇게 무리에서 존중과 배려를 받을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몰라 난감하고 당혹스런 한편으로
괜시리 목 안이 까끌거린다. 그럼에도 이제 원우는 고기라면 가릴 것 없이 먹게 되었으며 수렵 후 빈약한 불길로 살짝 그을려진
날짐승의 뒷다리 따위도 곧잘 뜯어먹곤 했다.
삐리리리리릭-,
문득 등 뒤에서 들리는 새의 울음소리가 귀끝을 스쳤다. 날카롭고 높은 울음이 구슬프게 귓바퀴를 쪼아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 보았지만 풀 숲은 미동조차 없었다. 형님, 왜 그래요? 옆에서 민규가 소리 낮춰 묻는 말에 원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어색하게
웃으며 앞니로 기름기가 흐르는 껍질을 뜯었다. 덜 익은 날고기의 누린내가 쿰쿰했지만 대강 씹어 넘겼다. 불과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이 다리로 들을 뛰놀았을 새의 다리 고기를 먹는다. 꿈틀대는 목을 비틀고 화려한 깃을 뽑아 그 속살을 불에 달군 고기.
원우는 그것을 먹었다.
남의 생명을 취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4.
생명을 취한다.
낮에 수렵狩獵한 새의 고기를 입으로 씹어 삼키었듯, 밤에는 발정發情한 남근을 뒷입으로 먹어 삼킨다. 음습한 고샅 틈새로 연신 찌걱대는 양물이 버거워 밭은 숨을 헉헉대던 원우는 스스로의 손목을 물어 뜯으며 입을 틀어 막았다. 그러자 원우에게서 손목을 잡아 내린 사내가 제 손가락을 대신 넣어 주었다. 혀 위를 말캉하게 쓸어 만지는 손가락을 어금니로 물어 씹었지만, 사내는 낯빛조차 바뀌지 아니한 채 다정스레 원우의 얼굴을 매만질 뿐이었다.
“치-치워... 만지지, 마요.”
원우가 거절했다.
손가락을 문 채 우물대며 경고하는 말 따위는 위협조차 되지 않는 듯, 사내는 여전히 원우의 뺨을 어루 만지며 감질나게 천천히 아랫도리를 문질러 댔다. 찌걱, 사내의 양물이 들어서는 틈새의 흠뻑 젖은 물기 진 소리와 뭉툭한 엄지 지문이 닳도록 원우의 입 안을 애틋하게 질척대는 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원우는 제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곧잘 들어주던 사내가 이런 순간만큼은 아무리 거절하고 밀쳐내도 듣지 않는 것이 얄궂다고 생각했다.
야속하고, 얄궂은 사람.
원우의 입에 넣은 엄지로 까슬한 혀끝이며 붉게 마른 아랫입술을 꾹꾹 만져대던 사내가 이내 고개 숙여 입을 맞추려 하자, 짜증스럽게 눈끝을 붉힌 원우가 사내의 앞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눈꺼풀을 간지럽히던 노란 금발이 걷어지고 드러난 눈매는 뾰족하고, 간절하다. 원우는 제가 이 눈빛에 약하다는 것을 매번 부정하곤 했었다.
“입을 맞추게, 해 다오.”
“안 돼요.”
“제발.”
마을에서 유일한 금발의 사내──수장이 속삭였다.
수장은 저를 밀어 내려는 원우의 손을 붙잡아 그 손목뼈에 대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원우가 움찔하는 틈을 노려 순식간에 입술을 탐했다. 먹잇감을 낚아 채는 매처럼 날랜 그 몸짓을 막아볼 새도 없이 입술을 빼앗긴 원우는 손톱을 세워 그의 날개뼈를 움켜쥐었다. 한번 입술을 맞댈 때마다 수장은 쉼 없이 집요하고 끈질긴 구애를 해 왔다. 그리고는 헐떡대는 원우의 입에 더운 숨을 불어 주며, 새끼를 돌보는 맹수처럼 부르튼 입술을 연신 핥아 대는 것이다.
“안…된, 다고, 했는데.”
“..미안하다.”
“그 입 닥쳐요.”
사과 따위 듣기 싫어서, 원우는 수장의 입을 제 엄지로 꾹 눌러 막았다.
그러다 입술 틈새로 슬핏 삐져 나온 혀가 간지럽히는 통에 흠칫 놀라 떼 버렸지만.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원우를 향해 낮은 웃음을 흘려대는 눈매는 여전히 간절하고, 간지럽다. 이 사내는 어찌 하여 수 없이 거절 당하면서도 끊임 없이 제게 살을 부벼 오는 것일까. 어찌 하여 그토록 수치와 모욕을 입고도 계속해서 저를 구해오는 것일까.
“……원우야.”
“..그렇게 부르지 마요.”
낮게 가라앉은 그 음성이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 두려웠다.
그
날 밤 말라 비틀어진 하얀 꽃은 불 속에 내 던져 졌지만 이 사내에 대한 감정마저 송두리채 내 버려지지 못한 미련맞은 몸뚱이는 몇
번이고 어리석은 행위를 번복했다. 손아귀 가득 움켜쥔 수장의 빛 바랜 금발을 매만지며, 원우는 눈꺼풀을 떨었다.
그는 여전히 이 마을의 수장이었다.
허나 전처럼 부락 밖을 나서지 못 했으며 사람들의 눈에 뜨이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비록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그것이 원우의 자유와 맞바꿔진 대가代價 라는 것을 원우는 어렴풋 깨달았다. 그 날 이후 수장에게서 아무런 고백告白도 듣지 못 했지만, 그러고도 남을 사내라는 것을 원우는 알고 있었다. 샛노란 수장의 머리뿌리는 까맣게 자라고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빨리, 끝내 주세요.”
천천히 아랫도리를 놀려 대며 부추겼다.
곧
끝내야 한다는 것을, 아니 그날 밤 이미 끝내 버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끊어내지 못한 이 사내와의 인연因緣이
끊임 없이 원우를 괴롭혔다. 사내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리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마을의 수장으로 남지 못 한다. 수장의
자리에서 내쳐진 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하기도 떠올리기도 싫은 것을 직면하고 싶지 않아 줄곧 회피했다.
그토록 많은 밤을 보내도 원우는 여전히 비겁하고, 치졸했다.
원우는 미워 해야만 하는 이 사내를 미워하지 못 했으며, 제가 이 사내와의 연을 끊어내지 못 하는 연유緣由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영원永遠을 약조하는 꽃은 불 속에 내 던져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 곧 거뭇하게 퇴색되어 버리는 하얀 꽃잎은 불타 버린 지 오래인데
이 사내가 제 뱃속에 토해 놓는 열정劣情은 어찌하여 그토록 하얀 것일까.
하으으윽, 원우는 크게 신음하며 꿀렁이는 뜨거운 품에 와락 안겨 바들 떨었다.
호시── 이 사내를,
더는 수장이라 부르지 못하게 되어도
주신主神이 허락한다면 그를 제게서 앗아가지 않기를.
=
너무 오랫만에 돌아온 글이라 부끄럽네요.
지난 11편으로 1부를 마무리 짓고,
그에 이어지는 2부로 새로 돌아왔습니다.
신캐릭으로 민규가 등장했네요.
원래는 예상했던 전개가 아닌데, 제가 그전까지 써두었던 글을 날려먹는 바람에()
새로 쓰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서브컾으로 민원이 살짝 들어갈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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