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수장은 뜨거웠다.
그의 몸은 언제나 데일듯이 뜨거워서, 그 손에 만져지고 그 품에 안길 때마다 원우는 꼭 제 몸으로 불이 옮겨 붙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 체온은 차게 식어빠진 제 몸뚱이마저 타오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꼭 신화(神話) 속의 이야기와 같았다.
주신(主神)에게 안긴 봄이 끝내 타 죽어 버렸던 것처럼.
수장의 손끝이 닿는 살갖은 그 열이 전염되듯 온기가 돌아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수장의 위에 올라탄 채 밑에서 치올리는 대로 하얀 몸을 하느작거리던 원우는 제 왼뺨을 감싸쥐는 뜨거운 손길에 저도 모르게 살풋 웃었다.
행복했다.
그 손이 저를 만져주는 것이. 그 품이 저를 꼭 안아주는 것이.
못 견디게, 행복했다.
..이대로 죽는다 하여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렇게 속삭이며 저를 품는 손을 꼭 겹쳐 잡았을 때, 수장은 대답하였다.
……그러지 말아라.
아무데도 가지 말고, 꼭 내 곁에만 있어 다오.
그렇게 말하는 눈이 어찌하여 그토록 서글프고 애통하였는지, 원우는 알지 못하였다.
다만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영원토록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다 신(神)께 청하였을 따름이었다.
57.
투둑. 투둑.
아직도 비는 멎지 않았다.
타닥. 타닥.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불씨가 피어 오르는 모닥불 곁에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쿵쾅. 쿵쾅.
수장이 내어 준 팔을 베고 누운 원우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빗소리를 듣고 있던 수장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고단하게 내리앉은 음성이었지만, 수장의 품에 귀를 묻은 원우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크게 울리는 소리였다.
58.
……나는 지금부터,
그 누구에게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것은 내가 너에게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았던 나의 비밀(秘密)이자, 절대로 네가 알아서는 안 되는 마을의 기밀(機密)이지만 너에게만 은밀히 전하는 것이니 부디 끝까지 들어 주기를.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다.
59.
오래 전부터, 나는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한번도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너에게 말을 걸지는 못했지만.
나는 너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번도 네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는 않았어.
내가 너에게 알려져서는 아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너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나다.
60.
일곱살 때, 나는 너를 구했다.
허나 그것은 해서는 아니 되는 행동이었어.
당시 너의 집은 딸린 식솔들의 끼니를 제대로 먹일 수 있을만한 여건이 되지 못할만큼 가난하였고, 궁여지책으로 네 아비는 장남인 너를 마을의 한 사내에게 팔았다.
나무 위에 앉아있던 나는 그것을 모두 보았다.
그 사내가 이미 너의 육친에게 값을 지불하였고, 미리 성립된 거래는 파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네가 그 사내에게 겁간 당하는 것을 보는 순간, 내 눈에는 그 사내의 급소가 보였어.
나는 돌팔매로 그곳을 쳤다. 사내는 죽었어. 당혹스러울 정도로. 너무도 쉽게 죽어 버렸지. 사내의 피를 뒤집어 쓴 네가 느꼈던 공포를, 나도 느꼈다. 그리고 직감했어.
내가 뒤집어 썼어야 할 ‘업’ 을, 네게 씌워 버렸다고.
내가 너를…… 망쳐 버렸다는 것을.
61.
피투성이가 된 너를 본 네 육친은 기겁하는 한편으로 안심했다.
사내에게 아들을 팔아 지불받은 값을 대가 없이 챙길 수 있게 되었다고 여기며, 고작 일곱살의 나이에 살생(殺生)을 저지른 제 장남에게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인지 기대를 품었어.
…그래, 네 아비는 네가 ‘수장’ 후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다.
신변에 위기가 닥치자 어떠한 능력이 개화했을지도 모른다고 여긴 네 아비는 너를 무장시켜 사냥터로 내몰았다. 아들이 ‘수장’ 이 된다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을 테니까.
허나 너는 실패하였다.
그리고 사고를 당하여 사경을 헤매었지. 나는 그것 역시 내가 너에게 씌워버린 ‘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때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너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야.
나는 너를 망쳐버린 책임을 져야 했다.
그래서 나는, 너를 그렇게 만든 멧돼지를 내 손으로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
그 엄니에 묻은 너의 피가 울부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눈에는 멧돼지의 급소가 뚜렷하게 보였어. 그 곳을 노렸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내리쳤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울어대는 그 짐승의 급소를 짓이기듯 꿰뚫어버리고, 손에 묻은 피를 보며 실감했다.
내 눈에는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고.
너로 인해… 각성한, 능력이라는 것을.
62.
‘수장’ 은 신의 후계(後繼)로 불리웠으나 신(神)은 아니었다.
사람의 몸으로 제 안에 도사리는 강대한 힘을 다스리지 못한 ‘수장’ 은 폭주했고, 마을은 ‘수장’ 의 손에 의해 극심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하여 생겨난 것이 바로 ‘제물’ 이었다.
‘수장’ 의 폭주는 한낱 사람 된 자가 신의 능력을 이어받는 것이 주신(主神)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신탁이 있어,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사내아이들 중에 ‘수장’ 의 액(厄)을 대신 받는 ‘제물’ 을 한 명 택하는 것이 관례였다.
…나는 너를 ‘제물’ 삼아 ‘수장’ 이 되었다.
‘제물’ 이 된 너는 밖을 나와서는 아니 되었고, 유폐(幽閉)되듯 사람들과의 접촉이 금해졌다.
그리고 너의 아비는 장남을 ‘제물’ 로 바친 공으로 마을의 장로가 되었다. 그러나 네가 ‘제물’ 이 되었다는 사실은 고위 장로들만이 알고 있을 뿐, 마을에 알려져서는 아니 되는 기밀(機密)이었기 때문에 네가 어떤 말을 듣고 어떤 처우를 받아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자해를 하거나 자결을 시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너를 살려 내었다. 네가 더 이상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나는 너를 살려 내었다. 네가 계속 ‘제물’ 로서 살아 있어야 내가 계속 ‘수장’ 으로 살 수 있을 테니까.
나를 위해 너에게 생(生)을 강요하였다.
네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너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집착을 계속해왔다. 내 존재가 너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네가 지독히도 죽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절할 뿐인 생(生)을 끊고 싶어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원우야,
나는 너를.
63.
"....그게, 무슨 소립니까."
"........"
"무슨.. 말이냐고, 묻고 있잖아요."
대체 어디서부터 경악해야 할까?
그동안 자신에게 이유 모를 호의를 베풀어 왔던 수장의 숨겨진 실체에 대해서? 몇 번이고 저를 팔아 호의호식을 누리려 했던 식솔들에 대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꼭두각시처럼 일생을 남의 손에 놀아났던 비루하고 치졸한 제 삶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이 우선이었을까.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원우에게 들이 닥쳤다.
‘형님은 아무것도 모른다’ 고 수차례 경고했던 도겸의 말이 이런 뜻이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로 하잘 것 없는 것들에 일희일비 하며 휘둘려 왔던 시간들이 눈 앞을 스쳐 갔다.
아찔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몇 번이나 저를 속이고 기만했는지 모를 눈 앞의 사내에게 홀린듯이 맹목적으로 매달려 왔던 지난 시간들이, 끔찍했다.
"이래서였습니까? 그동안 계속.... ‘미안하다’ 고 했던 게."
".....그래."
"내가 얼마나, 내가 정말 얼마나.."
"미안하다."
떠밀치듯 수장의 품을 박차고 일어났다.
고작 그런 말 따위를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끔찍하게도 듣기 싫었다. 원망스러웠다.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사과의 말이 수장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또 다시 이렇게 확인사살을 당하지 않았는가.
꼭 버려질 것 같고, 또 배신당할 것 같아서 싫었던.
그토록 뻔한 예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이었던 스스로가 우스웠다. 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이 사내는 그저 ‘수장’ 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저를 구했을 따름이었다. 계속 살아서 액을 받아낼 산 ‘제물’ 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산 열매를 따다 주고, 오래 살으라며 사슴 심장을 씹어 삼키도록 했던 것이다.
오늘만 해도 하루종일 찾으러 다녀도 코빼기조차 볼 수 없었던 주제에 제가 위험에 빠지자 기적처럼 나타나 구해주지 않았던가. 아마 다,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우습게도 착각하며 수장에게 빠져서 벌여왔던 제 추태를!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내가 왜 이토록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지, 왜 이토록 절망스러운지.
원우는 젖었던 옷가지를 뒤져 다 말라 비틀어진 꽃줄기를 꺼내 보였다. 본래의 싱그러웠던 하얀 꽃잎은 거무죽죽하게 바래버렸고, 꽃줄기에 묶인 금색 머리칼도 비에 젖어 볼썽사납게 흐느적거렸다.
한심했다.
이까짓 말라 비틀어진 꽃 한송이가 영원(永遠)을 약조한다 믿었던 우매한 이들이,
그리고 그깟 꽃 한송이를 절벽으로 내버리지 못했던 스스로가.
그 모든 것들이 원망스러워 눈꼬리를 파르르 떨던 원우는 끝내─
꽃을, 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 꽃줄기에 묶인 금색과 같은 머리칼의 사내가 일순 서글픈 눈빛을 했던 것은, 분명 어리석은 착각이었을 터다.
지금까지의 원우가 그러하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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