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열 길 물 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 속을 어찌 알 수 있겠느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사람은.
23.
"해가 지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마을에 사는 자라면 알고 있을 텐데?"
반박할 수 없었다.
원우 역시 익히 알고 있는 규칙이었고, 어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말없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마을의 통금을 어긴 자는 극형에 처해진다. 지난 번 통금을 지키지 못한 자는 형벌을 당하고 반병신이 되어 앓다가 결국 여흐레도 채 안 되어 죽었다고 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모질지 못한 제 자신이 차마 이루지 못한 과업을 성취당할 수 있다면.
"대답해."
길게 자랐던 앞머리가 걷어 올려졌다.
꿰뚫릴 듯한 눈.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멀리서부터 어른거리는 불빛에 마주친 그의 눈이 일순간 흔들렸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 끝에 미비하게 엿보이는 당혹감이 스치자 원우 역시 당혹했다. 생각보다도 앳된 눈빛이 원우를 구석구석 탐색하더니,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도망칠 구석조차 없어 꼼짝없이 그 눈을 마주해야만 하는 순간.
점차 다가오는 불빛이 얼굴로 드리워졌다. 횃불을 든 보초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원우보다도 한 발 먼저 그것을 직감한 그는 망설임 없이 원우의 발등을 찍어 누르며, 나무 기둥 사이로 밀어 넣어 숨긴 뒤 그 앞으로 떡하니 버티고 섰다.
"수장!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보초에게 대답하며, 수장은 반문했다.
"어째서 정해진 자리를 비웠지?"
"예? 뭔가 인기척이 들리는 듯 하여.."
"이 사이 네가 맡았던 곳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책임질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당장 돌아가겠습니다."
수장의 문책에 당황한 보초는 곧장 제 자리로 돌아갔고, 수장은 감시하듯 그 뒤를 따랐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 냉엄한 지시로 정평이 나 있는 어린 수장의 기에 눌린 것이 분명했다. 횃불은 저만치 멀어졌지만 원우는 한참을 일어서지 못했다. 걷어차인 발목이 시큰거렸다. 허나 그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 어째서.
잠시 자리를 비우고 달려온 보초를 날카롭게 몰아 세우던 그가 마을의 통금을 어긴 원우를 문책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통금을 어기는 것은 중죄이므로 원우는 극형에 처해져야 마땅했다.
오히려 숨겨주기까지 하다니.
혹시, 정말…….
─아니야.
있을 수 없는 일을 부정하며, 원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마른 무릎 위로 모아 쥔 손 안에 쥐여 있던 꽃을 바라보았다.
갓 따와 싱싱했던 하얀 꽃은 이제 숨이 죽어 살짝 시들했다. 어째서 내버리지 못했을까. 이까짓 꽃이 뭐라고. 여인네도 아닌데. 이깟 게 무슨 소용이라고. 손끝으로 꽃줄기를 팽그르르 돌리자 꽃받침 아래로 동여매듯 꽁꽁 묶여진 금색 머리칼이 만져졌다.
꽃 한송이조차 차마 짓뭉개버릴 수 없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24.
변한다.
변해 버린다.
제 딴엔 동무인 줄로만 알았던 아이들도 변했고,
저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도 변했고,
맏이라며 많은 기대를 걸었던 아비의 음성마저 변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었다.
영원을 약속하는 꽃조차 하룻밤이 지나니 풀썩 말라버린 것처럼.
25.
그래. 변한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처럼 변하기 쉬운 것은 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26.
언젠가 몸을 던졌던 그 절벽 끝에 앉아 있었다.
높이 부는 바람이 길게 자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난 밤 그 손아귀가 그랬던 것처럼. 찬 바람을 오래 쐰 이마에서 뜨끈하게 열이 돌고 있었다.
손 안에 쥐여진 꽃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벌써 끝에서부터 점차 시들기 시작한 하얀 꽃잎이 힘없이 팔랑거렸다. 손끝으로 꽃줄기를 핑그르르 돌렸다. 금색 머리카락이 따라 돌았다. 초록 줄기도 어느 새 조금 말라 있었다.
하룻밤 새 숨이 죽는 이깟 꽃이 뭐라고.
그토록 많은 사내들이 절벽을 올랐을까. 영원을 약조한다는 허울 좋은 달콤함에 속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버렸을까. 고작 하루도 가기 힘든 찰나의 순간만을 위하여.
한심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깟 꽃 한송이를 절벽으로 내버릴 수 없는 자신 또한 한심했다.
27.
밤 늦게 수장의 천막을 찾았다.
발가벗은 상체로 침상에 앉아 있던 그는 취침 직전 들이닥친 원우의 방문에 눈끝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지. 짤막하게 묻는 말에, 대답했다.
"저를 가지십시오."
수장은 다시 눈쌀을 찌푸렸다.
"지난 밤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사례를 해야 하지만, 나는 가진 것이 이 몸 밖에 없습니다."
마을에는 은혜를 입은 이에게 반드시 보은해야 하는 관습이 있었다.
작게는 자신이 가진 가축, 식량 등을 사례로 전달하기도 했고 목숨이 걸린 큰 은혜를 입은 경우 제 여식이라도 아내로 주곤 했다. 허나 사냥조차 혼자 할 수 없는 원우가 수장에게 바칠만한 재산을 갖고 있을 리 만무했다. 남은 것은 결국 하나였다.
"사례라."
수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치켜 올라간 두 눈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원우를 탐색했다. 가치를 가늠하듯 가차없이 꿰뚫리는 시선 앞에서, 마치 그에게 노려지는 들짐승이 된 기분으로 주먹을 꾹 쥐었다. 손끝이 떨려왔다. 그 눈을 처음으로 마주했던 때처럼. 그럼에도 차마 벗어날 수 없었던 것마저 그대로였다.
"사례가 너무 적은 것 같은데."
원우의 눈이 흔들렸다.
뜨거운 것이 울컥 치올랐다. 아비에게 뺨을 맞을 때도 성나지 않았던 가슴에 오기가 끓었다. 두 눈을 치켜뜨고 반문했다. 스스로조차 알 수 없는 치기였다.
"..이런 볼품없는 몸은 가지기도 싫다는 겁니까?"
"언성 높이지 마라."
"어차피 당신이 아니었다면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살려낸 건 당신 아닙니까. 더 이상.. 아무런 미련조차 없는 삶입니다. 언제 끝내도 상관 없으니 당신 손으로 거둬내란 말입니다!"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동안 누구에게 어떤 모욕을 입고 조롱을 당해도 입도 뻥끗 할 수 없던 비참하고 구차한 삶의 연명 속에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악을 썼다. 그것이 하필이면 수장의 앞이었다. 무엄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로 극형에 처해진다 해도 상관 없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으니. 이제와 수장에게 무슨 형벌을 당한다 해도 대수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 손으로 거두라, 했겠다."
원우의 말을 소리내어 곱씹은 수장이 손목을 잡아챘다.
그대로 상체가 끌려간 원우는 곧장 제 턱을 치켜 올리는 손아귀에 붙잡혔다. 피할 수도 없게 꼼짝없이 시선을 마주한다.
턱밑을 꾹 누르는 엄지가, 곤란할 때마다 물어뜯는 버릇이 배여 빨갛게 마른 아랫입술을 스윽 쓸어 벌린다. 포로로 잡힌 인질이나 노예의 건강 상태를 판단하듯 입 안을 확인당하면서도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 새삼 수치스러울 것도 없는 입술의 덜 여문 살갖을 집요하도록 매만지는 손길에 살짝 눈끝을 떨었을 뿐이었다. 데일듯이, 뜨거웠다.
"너는 이제 내 것이다."
네놈의 그 질긴 목숨도 더는 네 것이 아니니 감히 끝낼 수 없다.
끝내지, 못하게 할 것이야.
호시.
마치 범과 같은 그 눈을 마주하며, 원우는 깨달았다.
이미 처음 그 순간부터 이 사내에게 송두리채 지배당하고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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