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았다.
허나 이미 포기해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무언가 단 한가지를 죽여버릴 수 있다면.
원우는 망설임 없이 제 스스로를 죽여 버렸을 것이었다.
14.
낡은 천을 머리 위로 뒤집어 쓴 원우는 조용히 문 밖을 나섰다.
계집도, 과부도 아니었지만 얼굴이 드러나서 좋을 것이 없었다. 밖을 나간다는 것 만으로도 어떤 말들이 귀에 들려올 지는 뻔했다. 머리를 가리고 구부등히 어깨를 숙인 원우의 앞에 느물거리는 음성이 날아왔다.
"어딜 나가시려고, 형님."
도겸이었다.
첩의 소생이었지만 그동안 맏이인 원우가 하지 못하는 집안의 일들을 도맡아 처리해 온 도겸은 실상 아비의 뒤를 이을 후계자나 다름 없었다.
"이 꼴은 또 뭐야."
계집도 아니고.
코웃음을 치며 원우의 얼굴을 덮은 천을 걷어낸 도겸은 허우적거리는 원우의 손목을 잡아챘다. 너무도 쉽게 홱 끌려와 그대로 도겸의 가슴팍으로 턱을 박은 원우는 무덤덤한 얼굴로 도겸에게서 천을 빼앗았다. 조롱당하는 것은 익숙했다. 아비의 얼굴을 닮지 않은 도겸은 원우를 대하는 태도만큼은 아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누구 초상난 것도 아닌데 얼굴은 왜 가려. 설마, 나 죽으라고 그러는 건 아니시겠죠. 형님."
"....그런 거 아니야.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어서.."
"괜찮으시겠어? 짐승 그림자만 봐도 무서워서 오줌 지리는 거 아니야?"
고개를 떨군 채 입을 꾹 다문 원우의 머리꼭지를 마뜩찮은 눈으로 내려다 보던 도겸이 문득 손을 뻗어 원우의 엉덩이를 만졌다. 빈약한 살집을 주물럭거리는 손길에 마른 어깨를 살짝 떨면서도 차마 뿌리칠 엄두는 내지 못하는 원우의 귓가로, 소리죽여 속삭인다.
"오늘 밤 여기다 박아 달라고 빌어봐, 형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그 몸뚱이에 동생 씨라도 받아 내면 좀 나을지도 모르잖수."
느물거리는 도겸의 가슴팍을 밀쳐내고 돌아서 머리에 천을 뒤집어 쓰는 원우의 등 뒤로 특유의 쾌활한 음성이 나불거려온다.
"걱정마, 형님. 내가 후계를 잇게 되면 형님 정도는 거둬드릴 테니까."
그땐 형님 몸도 나한테 세습되겠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하하하.
귀를 틀어 막아도 들려오는 도겸의 웃음소리에 도망치듯 집을 나서며, 원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마디라도 차마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더 서러운 현실이었다.
14.
내달리듯 걸었다.
부락 밖을 나와 인적이 드문 들판까지 이르러서도 원우는 머리에 뒤집어 쓴 천을 쉽사리 벗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이 싫었다. 손가락질 당하게 될 까봐 싫었고, 이 얼굴을 보이는 것이 싫었다.
하얀 피부. 마른 생김.
또래 사내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결함이 되어 단지 그것만으로 원우를 깎아내리는 데에 정당한 근거가 된다. 아무리 무뎌진 스스로를 위안 삼아도 뾰족한 말에 어김없이 상처나는 못생긴 마음은 지겹도록 시간이 흘러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밖을 나와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을 뿐더러 혼자 사냥조차 하지 못하니 분명 추위에 얼어 죽던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던가, 짐승에게 잡아먹혀 죽게 될 것이다. 두려웠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자신을 죽일 용기조차 없는 비참한 삶.
이 지경까지 되어서도 여전히 미련맞은 고집을 부리는 자신을,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15.
물소리가 시원했다.
강가를 따라 걸으며 조용히 천을 벗었다. 이쯤 되면 사람을 만나지는 않을 것이다. 흘러가는 강을 마냥 따라가던 원우는 둥글고 넓직한 돌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끝이 뾰족하게 깨진 돌멩이를 주웠다. 날카로운 모서리를 찧듯이 찍어 내리며, 선을 새겼다.
원우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어릴 때도 종종 나뭇가지를 주워다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마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가 부담스러워 진 다음부터는 이따금씩 몰래 밖으로 나와 강가의 돌에 그림을 새겼다. 별로 잘 그리진 못했다. 다른 이의 그림을 본 적이 없어 비교는 할 수 없었지만, 단지 좋아할 뿐이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16.
해가 조금 저물고 바람이 서늘해졌다.
강가 바람은 싸늘해서 조금만 있어도 피부가 차게 식곤 했다. 그래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그렇게 돌 서너개에 맘껏 그리고 나면, 언제 휩쓸려 가버릴 지 모를 강가에서 조금 벗어난 큰 바위 위에 하나하나 모아두었다.
오늘 새긴 돌을 겹쳐 들고 낑낑거리며 바위를 기어 올라갔다.
도중에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돌을 떨어트릴 뻔 하기도 했다. 조심해서 천천히 하나하나 쌓아 올리고, 먼젓번에 새로 놓았던 돌이 있는 곳부터 확인했다. 삐뚤빼뚤한 형상이 새겨진 넓직한 돌 위로 빨갛게 익은 산 열매와 하얀 꽃 한 송이가 놓여져 있었다.
17.
가냘프면서도 수줍게 피어난 하얀 꽃.
험준한 절벽 위에서만 피어나는 터라 여인네들은 평생 구경 한번 해보기 힘든 꽃이었다. 이 꽃을 꺾어다 주는 사내에게 반하지 않을 계집은 없을 거라는 일설을 원우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요즘은 연심(戀心)을 고백하는 데에 많이 쓰여진다 했다.
이 꽃을 꺾으려 절벽을 기어 오르다 발 한번 잘못 헛디디면 그대로 저승 문턱을 밟게 되는 것이니 목숨과도 맞바꿀 꽃이라 하여 사내의 용맹스러움과 뜨거운 연정을 드러내는 의미로 건네는 것이었다.
이 꽃줄기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어 선물하면 영원토록 사랑이 이어진다고 믿었다.
18.
꽃 향기를 맡아 보았다.
싱그러웠다.
산 열매를 맛보았다.
달았다.
19.
원우가 이곳에 돌을 놓으러 올 때마다 이런 것이 놓여있곤 했다.
갓 꺾어 싱싱한 꽃과 잘 익은 열매 과실을 보면 두고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처음엔 단순히 우연이라 생각했었으나 마치 원우가 오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반복되는 '우연'을 몇번이고 마주하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원우를 위해 가져다 주었다는 사실을.
대체 누굴까.
꽃줄기를 찬찬히 살피던 원우는 멈칫했다.
태양 같은 금색 머리카락이었다.
20.
하늘이 어둑해졌다.
마을의 통금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원우는 쉬이 돌아가지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한참을 꾸물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쥔 꽃줄기만 하염없이 내려다 보았다.
태양 같은 금색.
이런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는, 마을에서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21.
어둠이 내리 깔렸다.
결국 원우가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아비가 오기 전에는 돌아가 있어야 했는데. 원우의 부재를 도겸이 알고 있으니 벌써 일러바쳤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멀리서부터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손에 쥐고 있던 낡은 천을 머리 위로 뒤집어 썼다. 누구 눈에도 뜨이면 안 되었다.
후우,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마을 문턱을 넘어설 때였다.
뒤에서부터 와락 덮쳐오는 손길에 붙들렸다. 나무 기둥으로 몰아세워지며 쓰고 있던 천이 벗겨지고, 관자놀이로 날카로운 날붙이가 겨누어졌다. 눈 깜짝하는 사이 제압당해 버린 원우의 턱밑에서 낮게 그르렁대는 듯한 음성이 속삭여졌다.
"누구냐."
"......"
"이름을 밝혀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꿰뚫리는 듯한 시선.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떨리는 위압감. 단숨에 들이닥쳐 위협하는 포식자의 밑에 내리깔린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분명 오늘 사냥한 들짐승의 피비린내일 것이었다. 물로 씻어내도 씻어지지 않는 강렬한 존재감에 본능적으로 알아채 버렸다.
"내가 이 마을의 수장, 호시다."
나는 이 사내에게 잡아 먹힌다─
제 앞머리채를 잡아 올리는 손아귀 안에서, 원우는 그렇게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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