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수장, 호시 - 04

iamond 2016. 1. 14. 04:41




28.

"다음 날 동 트기 전 마을 문 턱에서 기다려라."

그 말대로 이른 새벽 마을 어귀로 나왔다.
새벽 공기가 차가워 어깨를 으슬으슬 떨며 천막 밖을 나선 원우는 동구 기둥 앞의 금색 머리칼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다. 아직 마을의 누구도 눈을 뜨지 않은 시간이라 자신했었지만 수장은 벌써 나와 있었다. 기다리라던 분부와 달리 수장이 저를 기다리고 있음에 당황한 원우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 방금 왔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수장의 목줄기로 살짝 소름이 돋아 있었다.
당혹한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우물거리는 사이 수장은 말했다.

"오늘은 사냥을 나간다."

사냥.
원우의 얼굴이 굳었다. 안색이 파리해지는 원우에게, 그는 단언했다.

"나와 함께 할 것이다."



29.

"굳이 힘을 쓸 필요는 없다. 어떤 짐승이 어느 길을 다니는지 파악하고, 함정을 파 두면 된다."

수장은 영민했다.
그가 어떻게 이토록 어린 나이에 한 마을의 수장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에 사는 짐승의 습성과 서식지, 주요 동선을 모두 꿰고 있는 듯 하나하나 눈에 보이는 대로 원우에게 일러 주었다. 저 언덕 너머에는 곰이 사는 굴이 있다. 오늘은 그리로 가지 않을 것이다. 함정은 일찍 파 두어야 좋은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성공률이 높아진다. 우선은 사슴 덫을 설치할 것이다.

수장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수장이 하라는 대로 덫을 설치해 보기도 했다. 잘 했다. 태어나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놀랍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여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는 사이 밑으로 슬쩍 덫에 묶인 매듭을 고쳐 매는 수장의 손을, 원우는 몰랐다.



30.

이것저것 가르쳐 주며 수장은 원우에게도 꼭 한번씩 해보게 했고, 원우는 순순히 따랐다.

잘 했다.
이제 수장의 칭찬을 듣는 것이 귀에 익을 때 즈음, 어느 새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배가 고프지 않느냐?"
"예? 괜찮습니다..."
"덫에 뭔가 걸렸는지 확인하러 가자."

습관적으로 부정하는 원우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 끌어 왔다.
뜨거운 손. 체온이 높은 손바닥의 손금 새로 살짝 땀이 배어 들었다. 저와 맞춘 듯이 크기가 꼭 맞는 수장의 손은 군데군데 굳은 살이 박혀 있었고 살갖이 거칠었다. 원우는 상처 하나 없이 메마른 제 손이 부끄러워졌다. 사내답지 않은 손. 불명예스러운 손이었다. 조심스럽게 잡아 빼고 싶었지만 놓아주지 않는 수장에게 어영부영 이끌려 가는 사이, 수장은 홱 멈춰서며 원우의 입을 막았다.

쉿.
그리고 소리 죽여 풀숲에 숨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수장에게 안긴 채로 따라 앉으며 슬그머니 내다 보던 원우의 눈이 휘둥그레 해 졌다. 덫에 사슴이 걸려 있었다.

솔직히 놀랐다.
그저 시키는 대로 덫을 설치하면서도 반신반의 했고, 정말로 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치 않았었다.  사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큰 짐승이었다. 야생 짐승 특유의 거친 털가죽과 위엄있게 뻗어난 뿔을 보자 원우는 저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였다.

사슴은 덫에 걸린 채로 털을 세우며 발굽을 굴러 대었다.
땅이 울렸다. 쿵쾅. 심장이 죄어 든다. 쿵쾅. 귓가에까지 이명이 울릴 정도로 긴장되었다. 흔들리는 원우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수장이 속삭였다.

"잘 보거라."

허리춤에서 날선 쇠붙이를 꺼낸 수장은 풀숲을 헤치고 뒤에서부터 달려 들어, 단번에 사슴의 급소를 내리 찔렀다. 그리고 돌망치로 두개골을 내리쳐 기절시켰다. 짐승의 급소 골간을 완전히 파악한 자만이 취할 수 있는 대담한 방식이었다. 풀썩 쓰러진 사슴의 목에서부터 배에 이르기까지의 몸통을 칼날로 가르고 산 채로 심장을 뽑아 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 손을 잡고 있었던 수장의 손에 여즉 꿈틀거리는 사슴 심장이 쥐여졌다. 그리고 붉은 사슴 피가 튄 얼굴로 수장은 원우를 바라보았다.

"이리 와라."

그럴 수 없었다.
포식자의 눈. 그 눈을 마주한 원우는 그대로 전신이 굳어 버렸다. 피는 수장의 속눈썹 사이까지 튀었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를 천천히 깜박이자 원우를 바라보는 수장의 검은 눈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충격과 경악으로 창백해진 원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수장이 말했다.

"네가 잡은 첫 짐승이다. 의식을 행해야 하지 않겠느냐."

원우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내가 잡은 짐승. 그 덫은 분명 원우가 설치한 것이었다. 수장이 하라는 대로 따랐을 뿐이지만, 결국 그 덫을 거기에 놓은 것은 원우였다. 파르르 떨리는 원우의 눈이 여전히 뜨인 채로 핏물 젖은 사슴의 죽은 눈과 마주쳤다.

네 탓이다.
내가 죽은 것은─ 네 탓이다!

그렇게 원망하는 듯한 핏발 선 눈 앞에 원우는 입술을 떨었다.
내가, 내가 아니야. 내가 죽이진 않았어. 그렇게 변명하며 소리없이 입술을 잘근거리는 원우의 손목을 잡아 끄는 수장에게 붙들려 일어섰다. 수장은 붉게 얼룩진 손을 들어 원우의 머리를 어루 만졌다. 데일듯이 뜨겁고 비릿한 것이 발라졌다.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붉은 피가 꿈틀거리며 원우의 이마를 타고 흘렀다.

물들었다.
원우 역시, 붉게 물들었다.
수장의 손처럼.

그 모습을 확인한 수장은 제 손에 들려 있던 사슴 심장을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 잘게 씹으며, 원우의 뒷목을 끌어 내렸다. 저항할 틈도 없이 그대로 입술이 삼켜진 원우는 무방비한 입새로 밀려 들어오는 살덩이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끄덩하고 말캉하게 감겨지는 수장의 혀가 비릿한 살점을 넘겨 먹였다. 토악질이 나올 듯 했다. 밀쳐내려 했지만 무력한 전신은 말을 듣질 않았다. 수장의 혀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미음을 씹어 넘기는 어미처럼 뜨겁고, 집요하며, 다정했다.

원우가 입 안에 넘겨준 살점을 목구멍으로 전부 삼킨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수장은 고개를 들었다.
피로 얼룩진 붉은 입술이 속삭였다.

"첫 사냥한 짐승의 심장을 먹으면 아프지 않고 오래 산다는 구나."

여전히 속눈썹으로 대롱져 매달려 있던 핏방울이 수장의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원우는 그것이 꼭 눈물 같다고 생각했다.

"오래 살아라."

수장의 붉은 입술이 웃었다.
원우의 머리에 발라졌던 피가 뺨을 타고 주륵 흘러 내렸다.
울고, 싶었다.



31.

강가로 왔다.
온통 피로 뒤범벅 된 전신을 씻기 위해서였다. 사냥한 사슴을 어깨에 이고 온 수장은 강가의 널찍한 바위에 사슴을 올려 놓고, 물 속으로 첨벙 뛰어 들었다. 수장의 온몸을 적셨던 붉은 피가 물살에 떠밀리며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머리부터 잠수하며 금색 머리의 붉은 기를 뺀 수장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원우를 불렀다.

"빨리 와라, 기분이 좋구나."

원우는 망설였다.
어릴 적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머뭇거리고 서 있자 지척까지 훌쩍 다가온 수장이 원우의 발목을 잡아 물 속으로 끌어 당기며 제 품 안에 빠트렸다. 갑자기 찬 물살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화들짝 놀란 원우가 버둥거리는 꼴을 보고 키득거리며 웃은 수장이 손바닥에 물을 모아 원우의 머리로 끼얹었다.

푸흐, 어푸푸.
제대로 눈도 못 뜨고 허우적대는 원우의 머리를 씻어 넘겨준다. 젖은 얼굴의 물기를 훔쳐내며 간신이 실눈을 뜨자 웃음기가 그득한 수장의 얼굴이 코 앞까지 와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수장의 얼굴을 본 적은 이미 있었다. 허나 수장의 웃음은 처음 보았다. 젖었지만 데일듯이 뜨거운 손으로 원우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수장은 웃었다.

"입 안은 씻었느냐?"
"아직...."

우물거리던 대답이 채 끝마치기도 전에 삼켜졌다.
왼 뺨을 꼭 움켜쥔 손아귀에 끌려 내려가며, 다시금 입술이 겹쳐졌다. 피비린내 그득하던 원우의 입을 열어 헤치고 들어오는 혀끝에 저항할 새도 없이 사로잡혔다. 수장의 혀는 뜨겁고, 집요하고, 다정했다. 말캉하게 밀려 들어오는 혀에 구석 구석 닿지 않는 곳 없이 모조리 탐닉당했다. 입 안에 잔뜩 고여있던 피비린내 대신 수장의 뜨끈한 입김이 질척일 정도로 기도를 가득 메워지고 나서야, 수장은 원우를 놓아주었다.

"달다."

원우는 피가 흥건했던 제 입에서 피비린내 밖에 느끼지 못 했다.
때문에 수장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제 왼 뺨을 어루만지는 체온이, 어딘가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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