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가 저물면 달이 뜬다.
사내는 들로 사냥을 나가고 계집은 아이를 낳아 기른다.
들짐승의 고기를 먹고 자란 아이는 장차 그 들짐승을 수렵해 제 식솔을 먹여 살릴 사내가 된다.
그런 ‘사내’ 가 되지 못한 자는 일생 반쪽짜리 취급을 받았다.
2.
강한 수컷은 존경받는다.
사내는 단지 사내라는 것 만으로 존경받아 마땅했으며, 강한 사내는 특히 더 우월한 대우를 받았다. 이는 사내의 강함이 곧 마을의 식량 공급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 제가 직접 잡은 사냥감으로 딸린 식솔을 부양해야 한다는 것은 마을의 모든 사내들에게 주어진 의무였으며 권리이기도 했다. 식솔의 머릿수가 곧 그들의 할당량이 되어 압박을 가하기도 했으나 그만큼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이 되는 사회 구조 덕에 사내아이들은 걸음마를 뗄 때부터 무기를 손에 쥐고 자랐다.
사내아이는 제 손으로 첫 사냥을 완수한 시점부터 하나의 완전한 존재로 존중받고, 마을 축제에서 수장으로부터 제가 사냥한 짐승의 피를 머리에 발라지는 의식을 치를 수 있게 된다. 성인식을 치르지 못한 자는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개체로 취급 받았다.
3.
원우는 아직 의식을 치르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치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집안의 맏이이자 첫 사내아이였기 때문에 식솔들의 기대와 부담을 한 몸에 받으며 일곱살 때 사냥터로 떠몰려 졌다가 멧돼지에게 옆구리를 치여 죽을 뻔 했던 경험이 원인이었다.
그 이후 들짐승의 털가죽을 보기만 해도 오금이 얼어붙고 사지가 덜덜 떨리게 되어 사냥은 도저히 무리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짐승고기는 커녕 피죽도 제대로 못 먹는 구박데기로 전락하고 말았고, 아비는 가축 먹이조차 주지 말라며 강경하게 일갈하기도 했다.
의식을 치르지 못한 자는 집안의 수치라 불리우며 외출이 금지되는 일이 잦았기에 볕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창백한 피부에 비쩍 골아 비리비리하게 말라빠진 원우가 늦도록 혼례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4.
마을의 새 수장은 원우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호시' 라는 이명을 받은 그는 그 뜻 그대로 호랑이와 같은 눈초리를 가진 사내였다. 이전의 수장들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체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몸이 날래고 수완이 좋아, 함정에 걸려든 들짐승의 급소를 한번에 꿰뚫어 즉사시키곤 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수장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마을의 식솔들을 단 한 끼도 굶긴 적이 없었다.
그 비범함을 칭송하는 무리들의 입방아에 가장 자주 오르내린 소재는 바로 그의 첫 사냥이었다. 불과 일곱살의 나이에 멧돼지를 사냥한 수장은, 나무 위에 올라가 돌팔매질을 해 기절시킨 뒤 도끼날을 급소에 찔러 넣고는 산 채로 멱을 따 버렸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한 나절도 넘게 나무 위에서 기회를 엿보았다는 고작 일곱살 짜리 어린 아이의 무용담이 마을 전체에 돌려 퍼지기 딱 사흘 전, 원우 역시 처음으로 사냥터에 내몰렸었다.
5.
그가 축제에서 첫 의식을 받는 자리에 원우도 있었다.
스스로 사냥한 멧돼지의 피를 머리에 발라지면서도 당당하게 치켜 뜬 그의 날선 눈을 보며, 원우는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왼 옆구리의 깊은 상처를 매만졌다.
원우가 사흘 밤낮을 앓아누워 사경을 헤매는 동안 그가 사냥해 온 멧돼지의 왼 엄니에는 혈흔이 낭자했다. 설마 같은 멧돼지일 리는 없을 것이다. 크기나 생김이 얼추 비슷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짐승의 생김을 일일히 구별해 낼 만한 눈썰미는 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까만 눈. 볕에 그을린 까만 얼굴을 마주하며 오금이 저렸던 건, 그 까만 머리에 멧돼지의 피가 발라졌기 때문일 터다. 그 피가 같은 해에 태어난 또래 아이를 이제 부족의 완전한 사내로 거듭나게 했음에.
원우는 저도 모르게 조용히 시선을 내리 깔았다.
옆구리에 덧대어진 천 위로 잘게 떨려오는 손끝을 애써 무시했지만 그 눈은 한참동안이나 거둬지지 않고 있었다. 말없이 꿰뚫리는 듯한 눈빛에 숨이 죄어 들었다. 턱 밑으로 끓어오르는 굴욕감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면서도 차마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아직 의식을 치루지 못한 자신은 그와 결코 대등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6.
첫 의식을 치를 때, 사내아이는 자신이 사냥해온 첫 들짐승의 피를 머리에 바름으로써 육신에 그 짐승의 혼이 깃들게 된다.
그리하여 미성숙한 존재였던 아이가 비로소 완전한 사내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7.
사람들은 사내아이가 강한 전사의 정액을 받으면 그 육체에 전사의 혼이 깃든다고 믿었다.
의식을 치르기 전의 사내아이들은 부족의 강인한 전사들에게 다리를 벌리고 구멍을 열어 남근에서 뿜어져 나오는 씨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전사의 혼이 몸에 깃들도록 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그래야 전사의 가호를 받아 무사히 사냥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관례’ 를 무사히 겪어 낼 정도로 나이를 먹고 성숙해진 사내아이만이 사냥을 나가도 무방하다는 옛 선조들의 지혜이기도 했다.
8.
원우는 관례조차 치르지 않았다.
마을에서 가장 사슴을 잘 잡는 사내가 고작 일곱살인 원우를 겁간하려 했다. 아직 사내를 알지 못하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제 몸을 짓누르고 제 부끄러운 곳을 들추는 우왁스런 손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 원우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가느다란 다리가 잡혀 벌려지고 음낭 밑의 음습한 구멍까지 헤치는 사내의 손아귀에 흐느끼듯 몸을 움츠리던 원우는, 문득 제 몸 위로 겹쳐지듯 푹 쓰러진 사내에게 내리깔려 낑낑댔다. 사내의 움직임이 멎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먼저 스쳤다. 원우의 빈약한 가슴팍으로 고꾸라진 사내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타앙, 피가 새는 그 머리 위로 돌덩이가 날아왔다.
돌팔매였다. 데구르 굴러 떨어진 돌 모서리에 피가 흥건했다. 하늘에서 돌이 떨어지다니. 사내에게 천벌이라도 내린 걸까. 낑낑거리며 간신히 축 늘어진 사내의 머리를 밀쳐낸 원우는 온통 피범벅이 된 제 가슴팍이며 손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지만 더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자 기겁한 식구들은 방금 전 마을에서 사냥에 퍽 뛰어난 사내가 죽임당했다는 것과, 원우의 몸에 칠갑된 피를 보고는 황급히 무장을 시켜 사냥터로 내몰았다.
사냥을 하다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핑계를 대기 위해서였다.
9.
그후 원우는 악담에 시달렸다.
저주받은 아이라고. 고작 일곱살의 나이에 사내의 피를 묻혔으니 그 원한을 받아 멧돼지에게 공격당하고 생사를 헤매던 것이라고. 다 죽어가다 저승길 문턱에서 겨우 살아났으니 귀신에 씌인 것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심지어 식구들마저 원우가 첫 사냥에 낙오된 것은 관례를 어기고 사내에게 순순히 다리를 벌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때의 원우가 성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린 나이였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중요치 않았다.
또한 단순히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얼마 전 원우와 같은 나이에 멧돼지 사냥을 무사히 완수하고 첫 의식을 치른 아이가 있어 용납될 수 없었다. 아비는 입만 열면 그 아이의 이름을 꺼내며 원우를 괴롭혔고, 어미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원우를 둘러싼 온갖 흉흉한 소문 때문에 원우는 유폐되듯 집 안에만 갇혀 살았다.
또래 사내아이들의 볕에 그을린 까만 얼굴이나 거뭇한 몸과 달리 창백하고 마른 생김마저 원우가 불길하고 요망하다는 소문의 근거가 되었다. 흰 살갖은 부족의 주신(主神) 태양신의 가호를 받지 못했다는 의미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원우는, 철저하게 배척당하고 있었다.
10.
열 두살.
몇 년 동안 계속 된 식구들의 눈총과 타박에 못 이겨 끝내 사냥터로 다시 내몰렸으나 들짐승의 털가죽을 보니 오금이 얼어붙어 정신없이 도망치다 절벽까지 내몰렸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군침을 질질 흘려대는 승냥이 떼 앞에서, 사지를 벌벌 떨던 원우는 등 뒤의 절벽을 흘낏 내려다 보았다. 물살이 센 강줄기에서 까마득한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까.
죽겠지.
…죽으면, 지금보다 나을까.
소리없이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던 원우는, 그대로 두 눈을 질끈 감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11.
왼 뺨이 뜨거웠다.
꼭 감겨있던 두 눈은 너무도 눈부신 나머지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어렴풋이 왼 뺨을 스치는 온기는 마치 태양신의 손길처럼 뜨거웠다. 타는 듯이 달아오른 입술새를 꼼질거렸다. 기도를 파고드는 더운 숨에 목구멍이 간질간질 했다. 뜨끈하고, 포근한, 어딘가 코에 익은 냄새가 폐부까지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차갑게 식어있던 혀에 체온이 돌았다. 불덩이처럼 입천장을 쓸어넘기는 열기에 젖은 눈꺼풀이 바르르 떨려왔다.
으…음.
나지막한 신음성이 혀끝을 맴돌았다.
눈을 떴을 때, 원우는 강가의 넓직한 바위 위에 누워 있었다.
이명이 울리는 먹먹한 머리를 들었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앉아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잔잔히 물 흘러가는 소리만 들려오는 강 하류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태양이 뜨거웠다.
간만에 얼굴을 찔러오는 강렬한 빛에 지긋이 눈가를 찡그린 원우는 발가벗은 발끝을 지긋이 꼼질거렸다. 신발도, 무기도 가진 것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온몸이 흠뻑 젖어 간신히 죽다 살아났지만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파슥, 풀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풀숲을 헤치고 나온 작은 토끼 한 마리가 이쪽을 빼꼼히 바라보고 있었다. 식구들에게 면이 서려면 이거라도 잡아가야 했겠지만 원우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원우는 아직 토끼 한 마리조차 제 손으로 잡아본 적이 없었다.
소리없이 발끝을 꼼질거렸다.
킁킁거리고 냄새를 맡으며 이쪽을 살피는 토끼의 코끝을 따라 괜시리 입술만 삐죽거렸다. 일어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는 사이 토끼는 저 너머로 깡총깡총 뛰어 사라져 버렸다.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태양이 뜨거웠다. 여태 화끈거리는 제 왼 뺨처럼.
실은 이대로 평생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12.
짜악, 원우의 고개가 돌아갔다.
왼 뺨이 화끈거렸다. 아비에게 뺨을 맞는 일 따위는 이미 지긋하게도 익숙했다. 이제 그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어떤 이름이 나올지 역시 지겹도록 귀에 익었다. 매도하고 저주하는 말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었다. 그런 스스로를 가련하게 느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원우는 순순히 고개를 떨구었다.
나이가 열 여덟이나 되어도 ‘사내’ 라 불리울 수 없는 네놈이 일말의 수치라도 안다면, 마을의 전사에게 스스로 다리를 벌려서라도 관례를 치르란 말이다!
쩌렁쩌렁하게 고막으로 울려오는 노성은 꿈에서까지 원우를 찾아왔다.
제 몸 위로 올라타 음부를 만져오는 낯선 사내의 커다란 손에 지배당하며 쉼 없이 반복되는 아비의 일갈 후 가장 마지막에는 항상 그가 나타났다.
멧돼지 피가 번들거리는 까만 머리의 아이는, 이제 갓 수장이 되어 태양신을 의미하는 찬란한 금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사내로 변모하면서도 여전히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까만 눈으로 집요하리만치 줄곧 원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와 같은 해에 태어나 지금은 수장이 된 그 사내.
호시에게 뒷구멍을 벌리며 사정이라도 하란 말이다, 제발 널 범해 달라고!
뱃속에 그의 씨를 가득 받아 내면, 이런 네놈이라도 사내 구실은 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느냐?
꿈에서조차 끝도 없이 몰아세우는 음성을 뿌리치려 안간힘을 쓰다 끝내 발목을 잡혀 가랑이가 사정없이 벌려지면, 그때야 비로소 제 몸 위에 올라탄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 볼 수 있었다.
호시─
바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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