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 내겐 사랑이었음을.
1.
입을 조용히 다문다.
평소 순영을 아는 이들이라면 너답지 않게 뭐 하는 거냐고 피식 코웃음을 칠 법한 침묵이지만 정작 본인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도 못 했던 처음 3주를 빼면 이제 순영은 의도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괜히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순영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이미 정해져 있다.
손등까지 덮는 긴 소매.
순영은 제가 ‘손목 패티쉬’가 있는 줄은 여태껏 생각지도 못 하고 살았다. 그것도 반팔이나 민소매 등으로 완전히 살이 드러난
손목이 아니라, 손등을 덮을 정도로 긴 소매에 꽁꽁 감춰진 얇은 손목. 어디선가 남자는 홀딱 다 벗은 것보다 살짝씩 수줍게
드러나는 속살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제 취향이 딱 그거인듯 싶다.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긴 소매를 볼 때마다
정신이 빠져서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았다.
그리고 그 손목이 동성의 남자, 그것도 동갑내기 친구 녀석 꺼라고 하면.
역시 미친 걸까.
2.
전원우.
대학교 입학하고 처음 사귄 친구였다. 전날 고교 동창들과 무사 입학 자축한다며 부어라 마셔라 하는 바람에 술에 쩔어 늦잠을 잤고,
강의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슬그머니 들어와 앉은 자리가 우연히도 원우의 옆 자리였던 인연이다.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정신 못
차리고 고개 꼴아박은 순영에게 은근히 전공서적 페이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강의 진도를 알려주고, 학교 오면서 심지어 필통도 못
챙긴 순영에게 펜 하나를 슬쩍 내밀었다.
길게 내려진 회색 니트 소매로 빼꼼히 삐져나온 얇은 손가락,
오리엔테이션 때 나눠준 대학 마크가 찍힌 새 볼펜.
처음으로 각인된 원우의 인상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고마웠다”며 다시 펜을 돌려 주려던 순영에게, 원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가져.”
꼭 그날 입었던 회색 니트 같은 모노톤의 저음.
긴 소매를 잡아 끌며 노트와 필기도구를 챙긴 원우가 자리를 털고 일어 설 때까지 순영은 얼어 붙은 것처럼 꼼짝도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귀끝이 화끈거렸다. 이유도 알 수 없이 얼굴에 열이 오르고 머리가 멍멍해서, 울렁거리는 속을 꾹 참고 가방을 챙기며
순영은 속으로 애먼 숙취 탓을 했다.
3.
원우는 소매 내리는 게 버릇이었다.
가뜩이나 마르고 길쭉한 애가 그렇게 긴 옷만 좋아한다고 타박을 주는 척 했지만, 실은 원우가 소매를 잡아 내릴 때마다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시선을 떼지 못 하는 스스로가 부끄럽고 창피해서 그랬다.
괜히 그렇게 돌려 까는 척 할 때마다 원우는 “학교에 필통도 안 갖고 오는 놈이.” 하고 면박을 줬다. 이제 순영이 가지고 다니는
필기도구는 학교 마크가 찍힌 볼펜 한 자루, 딱 그것 뿐이었다. 원우가 준 펜을 다 쓴 후에도 학교 행사 등이 열릴 때마다
주머니에 한 웅큼 씩 집어 와서 제 자취방 한켠에 잔뜩 모아 두었다.
주머니에 그 펜을 항상 갖고 다니는 걸 원우에게 들킬 때마다 “그냥, 쓰기 편해서 그래.” 라고 둘러 댔지만, 습관처럼 소매를 길게 내려끄는 원우를 볼 때마다 주머니 속 볼펜을 손으로 만지고 있다는 것까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잡아 끌면 뚝 부러질 듯 얇은 손목─ 빈약한 펜 몸통을 손아귀에 꼭 쥐면서
소매 끝을 길게 내리는 하얀 손가락─ 매끈한 볼펜 앞코를 만질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까만 눈─ 손톱 끝으로 펜심 입을 꾹꾹 누른다.
보지마, 원우야.
이딴 감정 따윈 제발.
알지도 말고. 눈치 채지도 말아줘.
순영은 주머니 속 제 수음手淫을 원우가 영원히 알지 못하길 빌었다.
4.
그것은 어느 날의 흔한 술자리였다.
새해를 맞아 정한 선배가 주도하고, 승철 선배가 만든 자리. 순영의 연락을 받고 오기는 했지만 원우는 이런 분위기를 딱히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원래 술을 잘 하지도 못 하면서 그날 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건지, 선배들이 주는 술을 계속 홀짝 홀짝 받아 마시며
먹지도 못 하는 해물찜을 젓가락으로 쿡쿡 찔러대는 원우를 보다 못한 순영이 젓가락을 빼앗았다.
“야 전원우 너 자꾸 뒤적거리지 마.”
“폭탄주에 니 침 묻은 해물찜 넣어 버릴 거야.”
“아 형들. 원우 괴롭히지 마세요 그거 제가 먹을 거니까.”
“하이고. 이젠 하다못해 해물찜 흑기사까지 하냐 권순영?”
정한 선배와 승철 선배의 무서운 협박에 웃으며 응대한 순영이 망설임 없이 원우의 젓가락으로 해물찜을 집어 먹는다. 지훈의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건드려 놓은 낙지 다리를 대신 먹는 순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원우가, 드디어 기운이 쭉 빠졌는지 조용히 순영의 어깨로
머리를 기댔다. 질겅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피식 웃음이 터진 저음이 느릿하게 속삭였다.
“니 심장소리 겁나 크다.”
소매가 길게 덮힌 손끝이 순영의 무릎을 톡톡 건드렸다.
들려오는 심장 소리에 맞추어. 토독, 토독.
잠시간 묵묵히 받아주던 순영이 이내 짜증스런 손길로 그 손을 치우려다가 우연찮게 맞닿았다. 토독, 토독. 멈추지 않은 원우의
검지가 순영의 손 위로 계속해서 부딪혔다. 보드라운 니트 소매. 그보다 조금은 까슬한 손등. 열이 오른 손가락. 토독, 토독.
멈추지 않는── 심장 소리.
자꾸만 꼼질거리는 그 손을 짜증스럽게 잡아 채 깍지를 껴 버리고 말았던 것은 결국 순영이었다.
피식 웃음이 터진 저음이 나지막이 귓가에 속삭인다.
나 오늘,
재워줄래.
5.
뜨거웠다.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계속 들이켜고, 잘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꾸역꾸역 먹더니 평소보다도 훨씬 열이 오른 원우는 잘 가누지도 못
하는 몸으로 자꾸 기대듯이 부벼 왔다. 부축 정도로는 감당이 안 되서 거의 얼싸 안은 채로 간신히 순영의 자취방까지 당도하자
이미 눈이 풀린 상태였다.
“수녕아.... 나 더워.”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자꾸 엉겨오는 통에 순영의 옆구리도 조금 젖어 있었다.
답지 않게 양 뺨이 새빨개진 원우는 느릿하게 니트 목깃을 펄럭거렸다. 여간 취한 게 아닌지 목 밑까지 온통 발개져 있었다. 안주로
자꾸 매운 걸 집어 먹더니 입술도 붉었다. 그러다 옷 늘어날라. 자꾸 펄럭대며 목깃을 늘여대는 손을 꼭 잡아 내렸다. 배실배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흘리던 원우는 순영과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두 눈을 내려 감았다.
입술 안쪽이 바싹바싹 마른다.
원우의 빨간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순영은 이내 고개를 돌리며, 잔뜩 취한 원우를 제 몸에서 떨어트려 현관문에 기대 주고
신발부터 벗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취한 상대에게 손을 대는 건 비겁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이 정도로 만취한 원우를 본 적이
없는데, 제대로 돌봐주는 게 우선이라 생각한 순영은 원우의 손목을 잡아 끌고 제 침대에 앉혔다.
“수녕아...”
돌겠다 진짜.
가라앉은 저음이 부르는 소리에 일부러 쳐다 보지도 않은 순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응, 응,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이불을 끌어 오려다
느닷없이 홱 잡아 당겨져 그대로 원우 위에 쓰러졌다.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까만 눈을
마주하자 머리에 열이 올라서, 순영은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술 기운에 새빨간 원우의 얼굴이 짜증스럽게 구겨지며, 입고 있던
니트를 벗어 던지려 했다.
“아, 안돼. 감기 걸려 원우야.”
배 위까지 말려 올라 갔던 니트깃을 잡아 내리며, 흐트러진 긴 소매를 손등까지 꼼꼼히 덮어 주는 순영.
그 다정하고 정성스러운 손길을 보고 기가 찬 얼굴로 귀끝을 붉힌 원우가 결국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멱살을 잡아 당겼다.
“아 씨발 권순영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진짜 모르냐?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껏이지, 너 땜에 미치겠다 진짜.
전혀 꼬부라지지 않은 또렷한 발음으로 쏟아내듯 퍼부어지는 원성에 드물게도 동그랗게 뜨인 순영의 눈이 끔벅거렸다. 취기 때문이 아닌
이유로 열이 머리 끝까지 오른 전원우가 아직까지도 사태 파악이 안 된, 눈치가 없어도 정말 지지리 없는 권순영을 향해 일갈한다.
6.
야 권순영.
니가 나 좋아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너 나한테 첫눈에 반한 거 지훈이도 알고 선배들도 다 알아.
우리 과에 그거 모르는 사람 너 밖에 없다고 이 멍청아.
니가 평소에 티를 좀 냈냐?
사람들 다 있는데서도 그렇게 맨날 나만 쳐다보는데 모르길 바라는 것도 웃긴다 야.
너 혼자 중얼대는 버릇 있는 거 모르지?
막 옆에서 '전원우' '귀엽다' 중얼대는거 안 들어본 사람이 없다더라.
그래놓고 정작 내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고.
너 내가 소매 내릴 때마다 눈빛 달라지는 거 아냐?
내가 일부러 이런 옷 입고 오는....
..됐다, 그만 하자.
너 같은 새끼 때문에 내가 왜 이런 말까지 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우웁.
7.
아침이 밝았다.
본래 잠자리가 불편하면 편히 못 자는 습관 때문에 밤새 잠을 설친 원우는 뻑뻑한 눈을 끔벅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자취방 싱글
베드는 워낙 협소해서 남자 두 명이 누우면 꽉 찬다. 필연적으로 바짝 부둥켜 안고 잘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지금은 1월.
이불 밖은 차갑고, 식은 공기는 싸늘하다. 발가벗은 등으로 감겨 오는 뜨거운 손바닥이 아니라면 눈도 붙이지 못 했을 것이다.
새벽에서야 겨우 곯아 떨어진 순영의 자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피식 웃은 원우의 손가락이 고롱고롱 숨쉬는 코끝을 토독, 토독
건드린다. 차갑다. 이불 속은 후끈거리는 주제에.
몸을 살짝 돌리자 매트리스 머리맡에 놓인 연필꽂이가 보인다.
그득하게 꽂혀 있는, 학교 마크가 찍힌 볼펜. 팔을 뻗어 볼펜 하나를 꺼내 쥔 원우가 소리없이 웃었다.
권순영.
니가 이래도 날 안 좋아한다고?
키득거리며 볼펜 뒤꼭지를 제 뺨에 눌러 심을 켠 원우가 잠든 순영의 손을 끌어 올려, 네번째 손가락 안쪽에 글씨를 쓴다.
전 원 우 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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