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피를 빨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햇수를 헤아리는 것을 그만둔 것이
언제였던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했다. 그리고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산 먹이’를
탐하지 않고 살아왔는지 역시 금일今日에 다다라서는 몇 겹의 먼지가 쌓인 액자 속 낡은 사진의 얼굴만큼이나 흐릴 뿐이었다.
하얗던 시트와 당대의 고급 가구로
꾸며 져 있던 방은 이제 한낱 하인들이 쓰는 청소 도구함보다도 초라해 졌다. 격조 높은 가문의 문장이
전시된 진열장도 먼지가 켜켜이 쌓여 빛이 바랜 지 오래였다. 두텁게 내려진 보랏빛 벨벳 커튼은 손조차
대기 싫을 정도로 지저분했고 구석구석 거미줄이 쳐 있지 않은 곳을 찾기가 힘든 공간.
이 곳에서, 원우는 살고 있었다.
끊어지지 않는 생生의 그토록 길고
길었던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집사, 호시
iamond
1.
“주인니임─ 또 여기 계셨어요?”
짧은 노크 대신 투정 섞인 인삿말로 인기척을 낸 호시가 먼지 그득한 방 안의 탁한 공기에 질색을 하며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호시가 움직일 때마다 풀썩거리는 먼지가 공기 중을 부유하는데도 여느 때처럼 과묵한 주인은 아무 감흥 없는 눈으로 흘낏 시선을 주었을 뿐 대답을 아끼고 있었다. 묵은 때가 켜켜이 찌든 커텐이 짙게 드리워 진 창가에 가만히 서 있는 주인을 보고 짧은 한숨을 삼킨 호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칠흑 같이 새카만 머리칼, 창백하게 흰 얼굴, ‘피’ 처럼 붉은 입술.
호시는 제 주인을 볼 때마다 동화책 속 묘사를 떠올리곤 했지만, 한 떨기 드라이 플라워처럼 바싹 마른 주인의 자태는 갓 피어난 꽃송이처럼 생동감 넘치는 어린 소녀의 아름다움과는 한참 동 떨어진 것이었다. 노곤하게 풀린 자세로 서 있어도 제가 올려다 봐야 할 만큼 큰 키와, 새벽 하늘처럼 고요하고 나지막한 음성은 분명 그 동화가 쓰여진 시대에서 꼽는 화려한 미美와 거리가 멀었다. 빈말로도 귀엽다, 사랑스럽다 표현할 수는 없는 인상의 이 무뚝뚝한 사내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조소하면서도 호시는 좀처럼 제 주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때가 잦았다.
새빨간 핏빛으로 메마른 그 입술 때문일까.
입술색은 갓 태어난 아기의 깨끗하고 맑은 피처럼 선명한 빨강임에도 그 얼굴은 숨이 끊긴 시체처럼 핏기 없이 희어서, 발가벗은 몸에 보드라운 실크 가운만을 무신경히 걸친 채 창가에 서 있을 때면 이따금씩 숨이 턱턱 막히곤 했다. 적지 않은 시간을, 벌써 이 백년 동안이나 곁에서 보필 해 왔음에도 제 주인의 아름다움은 그토록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오래 전 기운 가세家世와 궁핍한 생고生苦에 제대로 된 ‘먹이’도 없이 근근이 연명 중인 허기진 상태인데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색色이라고 생각하며, 호시는 조용히 트레이 커버를 열었다.
“아침 식사입니다.”
“안 먹어.”
“또 그러신다. 세상에 빈혈로 쓰러지는 뱀파이어처럼 웃긴 게 없다고요.”
“식욕이 없어.”
“언제는 식욕으로 드셨어요? 살려고 먹는 거죠, 살려고.”
“살기 싫어.”
퉁명스런 대꾸에 호시는 다시 한번 짧게 한숨을 삼켰다.
윤이 나는 은 쟁반에 가지런히 받쳐 든 백색 사기 잔 가득 찰랑대는 붉은 액체를 흘낏 내려다 보던 호시는, 이내 제 손으로 직접 잔을 들고 한 모금 크게 머금었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던 주인의 팔목을 잡아 끌어 입을 맞춘다. 슬쩍 열린 입새로 입술 안쪽부터 적셔가며 조금씩 흘려 먹여주자, 차게 식어 있던 주인의 혀끝에 비로소 열이 돌았다.
아기 새처럼 가만히 벌린 채 주는 대로 받아 먹기만 하던 목구멍에서 어느 새 달아 오른 숨결을 내쉴 때쯤, 주인의 손이 호시의 가슴께를 먼저 붙잡았다. 후으, 으으…. 거칠어진 신음성이 윗니를 할퀴고 입천장을 휘감았다. 일방적인 단식이 깨져버린 다음 순간의 피맛처럼 황홀한 것은 없다. 건조하게 말라붙어 있던 주인의 눈이 열락과 흥분으로 붉게 흐려지는 순간만큼 아름다운 때는 또 없다는 것을, 호시는 알고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붉게 점철되는 혀끝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벌려 진 채 허공을 가른 입술이 멈추었다. 의아하고 짜증스럽게 내려 보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호시는 안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주인의 빨간 입가를 촘촘히 닦아 주었다.
“이제부터는 혼자 드실 수 있죠.”
“…너 진짜,”
“식욕이 돌아오신 것 같은데.”
“짜증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원망한다.
또 미움 받아 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호시는 애써 담담하게 주인의 손에 잔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분에 차 올라 손끝을 바들거리던 주인이 결국 신경질적으로 잔을 팩 던져 버리자, 벨벳 카펫 바닥에 깔아 놓았던 러그로 붉게 얼룩이 진다.
저의 주인은 아름답고, 변덕스러우며, 지랄 맞다는 것을.
호시는 애석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2.
“아이고 내 팔자야.....”
붉게 얼룩 진 러그를 비눗물에 북북 문질러 빨며, 호시가 한탄했다.
하루에도 수 십번씩 바뀌는 주인의 변덕에 아랫사람만 죽어 난다. 인간을 고용할 수도 없고, 뱀파이어는 원체 자존심 빼면 시체인 집단인지라 아무리 하인이라도 이런 대우를 받으면 얼마 가지도 않아 금세 일을 때려치워 버리기 일쑤였다. 가세가 기울고, 세월이 흐르는 와중 이런 열악한 근무 환경에 여지껏 버티고 남아 있는 하인은 결국 호시 뿐이었다.
사실 요즘은 뱀파이어 자체도 거의 멸종 위기인 시대라 이 나라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순수 혈통은 거진 제 주인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번식력이 희박하게 낮은 순수 혈통 가문의 유일한 핏줄인 몸이라 어려서부터 곱게 길러 진 탓인지 원체 입맛이 까다롭고 예민한 주인은 혈액팩에 든 죽은 피 따위를 질색해서, 매 식사 때마다 곤욕스럽기가 짝이 없었다.
맛 없어, 안 먹어.
결국 영양 실조와 빈혈로 쓰러져 누운 병약한 몸 주제에 여태 정신 못 차리고 까탈스럽게 편식을 해대는 주인에게 그래도 드셔야 한다고 사정사정을 하는데도 잔을 집어 던지며 고집통을 부리는 성질머리에 참고 또 참던 호시마저도 인내심의 한계점이라는 것이 끝내 폭발하여, 홧김에 입으로 직접 먹여 버리는 수단까지 강구하고 말았던 것이 시발점이었다.
3.
차갑다.
붉게 메마른 주인의 입술과 맞닿은 첫 순간의 감상이었다. 입술도 차가웠고, 입 안 가득 머금었던 피도 차가웠다. 냉장 보관하던 죽은 피의 비릿함은 끔찍하게 역겹다. 아무리 호시라도 오래 음미하긴 싫은 맛이라, 얼른 먹여 버리고 끝내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간만에 입에 대 보는 남의 살에 일말의 설렘이나 흥분을 느낄 새도 없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주인의 혀와 격렬히 부딪혔다.
감히, 너, 따위가─,
싫더라도, 드셔야, 한다구욧─,
목구멍으로 삼켜지는 살기 등등한 노성에 맞서 싸웠다.
본능적으로 바짝 올라선 송곳니가 날카롭다. 건조하게 마른 혀돌기마저 매몰차게 호시를 거부했다. 이를 세우고 거칠게 밀쳐 내는 포악에 지지않고 버팅기다 그만, 혀끝이 깨물려 상처가 났다.
그 때였다.
상처난 혀끝으로 배어 나온 호시의 피가, 뒤엉킨 입 안에 섞여 들었다. 살아 있는─ 신선한 피. 그 향긋한 내음이 순식간에 기도로 피어올랐다. 시야가 붉게 튀는 듯한 강렬함. 그 자극적인 감각에 움찔한 주인의 빈틈을 노려, 방심한 목구멍에 연신 먹여 주었다. 더 이상 어떤 거부조차 하지 못 하고 꼼짝없이 붙들린 주인은 입 안 가득 머금었던 피에 더해진 타액까지 모조리 받아 먹어야만 했다.
몸은 솔직했다.
조금이라도 삼킨 순간부터 맞닿은 체온에 불이 켜지는 것을 곧장 감지할 수 있었다. 차갑고 비릿한 냉장 피가 삽시에 덥혀질 정도로 육체는 빠르게 반응했다. 억지로 받아 넘겨졌을 뿐이었던 수동적인 처음과 달리 탐貪을 내기 시작한 본능이 점점 맹목적으로 호시의 혀끝에 매달려 왔다. 상처로부터 퐁퐁 샘 솟는 호시의 피, 살아 있는 동족同族을 ‘먹이’ 삼는 금기를 맛본 몸은 더 이상의 굶주림을 용납하지 못 했다.
‘더 줘.’
애원哀願했다.
제대로 가누지도 못할만큼 격앙되어 바들거리는 몸을 받쳐 안은 호시의 품에 쓰러져, 흐느끼듯 사정事情했다. 주체할 수 없이 녹아 내리면서도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으려 옭아 매는 육신을 간신히 침대에 던져 놓고 돌아서려는 목덜미로 감긴 팔에 와락 끌어 내려진 후에야, 짧은 숨을 삼킨 호시는 결국 제 주인의 몸에 올라 타고 말았다.
사정事情이 사정射精이 될 때까지.
호시는, 제 피를 탐貪내는 주인을 탐貪했다.
4.
또 다시 골방에 틀어 박혔다.
먼지라면 질색을 하는 제 하인은 꼭 필요한 용무가 아닌 이상 예까지 들어 오지 않는다.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 멋대로 치워 버리지 말라고 수 차례에 걸쳐 단단히 명령해 두자 간단한 소제조차도 없이 방치된 이 방은 원우 밖에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살아가려는 행위를 잊고 싶을 때, 살아가기 위한 그 어떤 노력조차 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원우는 이 방에 왔다. 발가벗은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대어 보면 미약하나마 고동이 느껴진다. 차가운 코 끝에 손가락을 대어 보면 느릿하나마 숨이 느껴진다는 현실에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원우는 살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영원永遠의 시간.
멈추어진 제 삶을 연명하는 이 숨에도 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원우의 가라앉은 시선이 서랍 위에 놓인 액자를 향했다. 오래도록 손 대는 이 없이 방치된 사진은 이제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쌓여 버린 먼지로 가리워 져 있었다.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
감히 손 댈 수 없었던 액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한참을 빤히 보다가, 멀리서 들려 오는 제 하인의 인기척에 황급히 내려놓고 돌아선다. 차마 그 얼굴까지는 보지 못하고 다시 어설프게 올려 놓은 액자가 방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툭 떨어져 버렸다는 것을 모르는 채, 원우는 방을 나갔다.
5.
“하여튼 그놈의 성질머리 하고는.”
주인이 없는 곳에서 마음껏 욕을 하며, 호시는 겨우 다 말린 러그를 바닥에 다시 깔았다.
풀썩 내려 놓자마자 카펫에서 푸스스스 일어나는 먼지에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면서도 구김 없이 놓이도록 매무새를 매만지던 호시는 문득 서랍장 밑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록 주인이 절대 아무것도 손 대지 말라고 엄금하긴 했지만, 평소 주인의 발길이 자주 닿는 범위만큼은 몰래 몰래 정돈을 하곤 했기에 별 생각 없이 손을 뻗어 올렸다.
액자였다.
“하이고~~~~ 먼지 봐.”
집자마자 그득하게 묻어 나오는 묵은 먼지에 한탄을 하며, 이왕 더러워진 엄지로 눈 딱 감고 사진을 슥 밀어 닦았다. 그리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일순 고민하다가 커텐 밑 속겹에 샥 닦아버린 호시는 한결 개운해 진 마음으로 액자를 다시 보았다. 젊은 시절 - 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지금과 별반 달라진 것은 없는 외모 - 의 주인이었다. 아직 반절까지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지만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
주인은,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주인의 웃는 눈을 빤히 들여다 보던 호시는 아예 커텐을 끌어다 사진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얼굴이기에 좀더 보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먼지가 풀풀 날려 오는 것을 인상 박박 쓰며 꾹 참아 낸 호시는 마지막으로 남은 먼지를 후 불어 내며, 숨을 꾹 참고 사진을 보았다.
호시의 눈이 가늘어 졌다.
주인의 곁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흑백 사진임에도 그의 머리칼은 밝았다. 가늘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 날선 눈매와 달리 장난스러운 웃음을 띤 입매가 잔뜩 올라간 유쾌한 인상이었다. 그의 곁에 선 주인 역시 웃고 있었다. 그 검은 눈은 지금처럼 메마르지 않았고, 하얀 얼굴은 사랑 받는 기색이 만연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누워 있었다. 호시의 눈이 틀리지 않다면 그것은 분명──
이 방의, 침대였다.
아무리 소제掃除 하지 않았다지만 벌써 이 백년을 이 저택에서 단신으로 일해 온 몸이다. 가구의 소재素材와 배치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리고 평소 이상할 정도로 이 방에 집착하는 주인의 독선이 직감적으로 호시를 깨닫게 했다. 저 남자는 주인의 단순한 친우가 아니다. 발가벗은 두 사람의 어깨, 한 이불 속에 가려진 몸의 뒤엉킴을 보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 자야말로 주인을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리게 하는 사내라는 것을….
말 없이 액자를 다시 서랍장 위로 올려 놓던 호시는, 조심성이 부족했던 탓인지 그만 액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긴 시간을 애지중지 지켜 온 주인의 보존이 무색할 만치 액자는 너무도 쉽게 깨져 버렸다.
으앗, 어떡해.
크게 금이 가서 깨진 액자 유리를 황급히 정리하던 호시는, 먼지 낀 표면에 거무스름하게 비치는 제 얼굴을 보았다.
가늘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 날선 눈매.
유리 조각을 쥔 손끝이 바르르 떨리었다. 호시의 눈이 가늘어 졌다.
그렇다.
호시는, 사진 속 그 남자와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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