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도 않는 고2의 6월 중순, 딱 네 생일 이틀 전이었던 여름 날.
너는 여느 때처럼 읽지도 않을 책들을 쌓아 턱을 받쳐놓고 책상에 멍하니 엎드려 있었다. 그래도 도서실에 들려 주던 처음 몇 주간은 최소한 읽는 척이라도 했었는데. 이제는 쓸데없는 이유 따위도 댈 필요 없다는 듯 당당하게 눌러 앉아서, 내 옆얼굴만 빤히 바라보는 집요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다음 장을 차락 넘겼다. 이번 주에 새로 등재된 책이라 아직 한장 한장이 빳빳해 날카롭게 스치는 마찰음이 났다. 새 책을 넘기는 이 감각을 좋아해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원우야.
왜.
내일 모레 내 생일이야.
응.
..그런 거,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어.
올해 첫달이 되자마자 내 방 달력에 제일 먼저 표시해 두었으니까. 유월달의 십오일. 빨간 펜으로 삐뚤빼뚤 꽃 그림까지 그려놓은 건 절대 말 못하지만. 실은 한달 전부터 선물로 뭘 줘야 하나 곰곰히 생각하면서 혼자 도서실에 하염없이 앉아있던 것도 물론 비밀이다. 그러다 대여 목록 장부를 정리하면서 세번이나 숫자를 틀렸던 것도.
선물, 안 줘도 되니까.
....?
나랑 만나줘.
..앗.
다음 장을 넘기다 그만 종이에 베였다. 놀라서 멈칫한 사이 줄곧 늘어지게 엎드려 있던 네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내 손을 덥썩 잡아채갔다. 얼굴 가까이에 바짝 갖다 댄 손끝을 날카롭게 치솟은 눈으로 세세히 살피던 너는, 끝에 작은 핏방울이 살짝 맺혔을 뿐이란 걸 확인하고서야 눈썹의 긴장을 풀고 한탄같은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전원우, 사람 놀라게 하는 데 뭐 있어.
그건 내가 할 소리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낮은 중얼거림을 듣는 둥 마는 둥 내 검지 손끝을 꼭 쥔 너는 망설임 없이 그대로 입에 가져가 쪽 빨며 지혈했다. 데일듯이 뜨거운 입안 점막, 스치듯이 닿았던 혀끝에 꼭 전신이 핥아지는 기분으로 귓가가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 날선 눈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눈끝이 화끈거리는 온도에 스스로조차 놀라 화들짝 시선을 피했다. 안돼. 들켜버릴, 것.. 같아. 입 안으로부터 빼꼼히 빠져 나온 검지 끝이 그 입술에 몰캉 닿아서, 파드득 주먹을 꼭 쥐었다. 안돼. 안돼. 안돼....
전원우.
.......
…우리, 키스할래?
빤하게 향해오는 곧은 눈과 마주한 순간.
더 이상 머릿 속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져서. 나중에 떠올려도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마자 지긋이 턱을 틀어 가까이 다가오던 네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을 꼭 감았다. 말캉하게 살포시 맞닿은 네 입술이 꼬옥 눌려지고 조심스럽게 열린 사이로 너는 똑똑 노크를 했다. 거기까지 하는 데도 원체 체온이 높은 네 손바닥 주름 사이로 슬쩍 땀이 배어 나왔다. 그런 네가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싫었어?
……아니.
좋아해. 너를 너무 좋아해, 순영아.
그렇게 말하기에는 나조차도 채 감당이 되지 않는 이 마음의 크기가 너무 무거워서. 여태 붙잡혀 있던 손을 꼬옥 맞잡으며 조용히 너에게 입을 맞추었다. 파들 떨리는 네 입술 사이로 파고들며 너의 뜨거움에 마냥 어리광을 부렸다. 무서웠다. 너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이렇게도 너를 좋아하는 내가 너무 무서웠다. 성큼 다가와 나를 온통 휘저어 놓는 너의 혀끝에 줄곧 매달리며─ 어서 네가 나를 전부 집어삼켜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내가, 스스로조차 무서워서.
나는, 조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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