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 전집사

iamond 2016. 1. 4. 21:42

 

1.

똑똑.
하얀 면장갑을 낀 손이 격식 차려 방문을 두번 노크하는 소리로 하루는 시작된다.

"주인님, 기상 시간입니다."

나지막한 저음으로 문 밖에서 제 존재감을 알린 전집사는 이제 양해를 구하지 않고 곧장 문고리를 열었다. 아침잠이 많은 주인은 이제 더 이상 칭얼칭얼 떼를 쓰던 철부지 도련님이 아니라 회사 중역의 자리에까지 올라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직접 깨우러 와야만 겨우 눈을 뜨곤 했다. 물론 주인이 이 나이 먹어서까지 여즉 어리광이 심한 것은 일찍이 버릇을 잘못 들여놨기 때문이라는 것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검은 구두를 신은 채로 성큼성큼 침대까지 걸어온 전집사는 다시 한번 소리 내어 현재 시간을 공지했다.

"주인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는 주인의 눈꺼풀은 깊게 감겨 있다. 소리없는 한숨을 작게 내쉰 전집사는 장갑 낀 손을 뻗어 이불을 걷어 냈다.

"주인님, 실례하겠........ 앗."

이불을 걷어 올리는 손목이 와락 잡히더니 그대로 홱 끌려 들어가 주인의 가슴팍에 엉망으로 머리를 처박히는 상황에서도, 전집사는 놀라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응했다.

놓아 주십시오. 지금 이러고 계실 상황이 아닙니다.
전집사의 냉담한 반응에도 아랑 곳 않고 주인은 전집사의 잘 정돈되었던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꼭 끌어안고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아아~ 아침부터 맡는 전원우 냄새. 상쾌해.
킁킁거리며 냄새까지 맡고 있다.

"주인님, 출근 준비 하셔야 합니다. 오늘 아침 10시부터 중역 회의가 있으십니다."

머리가 꼭 끌어안긴 채로 아침 일과를 간단하게 브리핑하는 전집사의 사무적인 저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물론 그런 전집사의 귓바퀴를 손가락으로 꼼질대는 주인의 못된 손장난 역시 스스럼이 없었다. 이 상태로 무슨 말을 해 봤자 소 귀에 경 읽기라는 걸 알고 있는 전집사는 다시 한번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더니,

실례하겠습니다,
깍듯한 양해를 구하며 손을 뻗어 주인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걸로 간신히 품 안을 탈출했다. 그리고 머리가 마구 헝크러져 있다는 것 외에는 흠잡을 데 없는 정자세로 허리를 우아하고 꼿꼿하게 편 전집사가 다시 한번 공지한다.

"한번만 더 게으름을 피우시면 발가 벗겨서 욕실로 밀어 쳐 넣을 겁니다, 민규 도련님."
"아아, 전집사가 아침부터 그런 외설적인 발언을 하다니 아랫도리가 꼴려서 일어날 수가 없어."
"그러십니까?"

촤악, 단숨에 이불을 걷어 치운 전집사는 장갑 낀 손으로 주인의 하반신을 검사했다.
오늘도 신체건강한 젊은 주인은 벌써부터 기세등등하게 발기한 상태였다. 다시금 소리없는 한숨을 내쉰 전집사는 망설임 없이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파자마와 브리프를 한번에 끌러 내렸고, 속옷을 내리자마자 참을 성 없이 퐁 튀어오르는 주인의 남근을 장갑 낀 손으로 움켜 쥐었다.

"어떻게 해드리면 됩니까."
"입으로. 젤리 먹듯이 살살 녹여줘."
"알겠습니다."

주인의 몸 상태는 당연히 집사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하는 영역이었다.
더욱이 동년배의 동성이기에 남성의 생리와 기호에 대해서도 이해도가 높아야 마땅한 전집사는 익숙하게 입을 열어 주인의 요구대로 살포시 머금고 혀를 살살 굴려댔다. 표정없는 얼굴로 혀를 내밀어 핥으면서도 시선은 주인을 똑바로 향하고 있다. 주인의 부름에 곧바로 응답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항상 빈틈없는 모습을 보이는 전집사가 잔뜩 흐트러진 머리로 제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모닝 펠라치오를 봉사하는 광경이라니. 베개를 올려세워 목을 받쳐놓고 연신 바라보던 주인은 흡족하게 웃으며 팔을 뻗어 전집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갑 벗어주면 안 될까?"
"안됩니다."
"원우야, 젤리 안 먹어 봤어? 왜 이렇게 감질나게 굴어 사람 피 말리게.."
"죄송합니다."
"너 이러는 거 보니까 그냥 눕혀놓고 뒤에다 박고 싶어."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셨습니다."

그럼 된다는 소리네,
기다렸다는 듯 전집사의 손목을 잡아 무작정 침대로 깔아 눕힌 주인이 명령한다.

원우야, 다리 벌려.
소리없는 한숨을 내쉰 전집사는 익숙하게 벨트 버클을 푸르고 바지 지퍼를 내리며, 주인에게 복종한다.

"지각하시면 안됩니다."
한 마디를 덧붙이며.



2.

주인의 출근 준비를 보필하고, 대문 밖까지 배웅을 마친 뒤에야 고용인들은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오늘의 메뉴는 십자 모양으로 토스트 한 호밀빵에 생크림과 그뤼에르 치즈를 듬뿍 바르고, 프로토슈를 빽빽히 채워 넣은 크로크 무슈와 어니언 수프를 곁들인 한상 차림이었다.

프렌치 퀴진은 주방을 총괄하는 급사장 윤셰프의 주 전공이기에 맛은 충분히 보장할 수 있을 만한 퀄리티였지만, 주인의 식단을 담당하는 윤셰프가 헤비 스모커라는 것과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기르고 있다는 것 두 가지가 전집사 개인적으로 썩 탐탁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입맛 까다로운 주인이 그의 요리를 마음에 들어 하니 여즉 그에게 총 주방장 자리를 맡기고는 있지만서도.

"와아~ 오늘 요리 끝내주네요 윤셰프님!"
"찬이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똥 씹은 얼굴로 빵 씹는 어느 집사장 때문에 체할 것 같았는데."
"에이, 집사장님도 워낙 표현이 없으셔서 그러신 거지 안 좋은 뜻으로 그러시는 건 아니에요. 지금도 분명히 맛있게 드시고 계실 거예요. 그쵸, 집사장님?"
"..식사 중 잡담은 삼가죠, 이찬씨."
"네... 죄송합니다."

전집사의 냉랭한 지적으로, 맛있는 요리에 신이 나서 싱글벙글 하던 찬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지고 고용인들의 식탁도 순식간에 싸늘해진다. 이런 숨 막히는 분위기를 참지 못한 윤셰프가 긴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며 따져 왔다.

"어린애한테 그렇게 핀잔 주면 마음이 편하십니까? 좀 너무하신 것 같네, 집사장님."
"제 언사가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죠."
"아니 사과를 받아내려는 게 아니라.... 그냥, 밥이라도 편하게 먹자는 거죠."
"윤셰프,"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닦은 전집사가 물어오는 말에 순간 긴장했던 윤셰프는, 이내 제 귀를 의심했다.

"후식으로 젤리 됩니까?"
"제..젤리라니."
"없으면 됐습니다."
"아니 없다는 게 아니라 집사장님이 그런 걸 주문하는 게 처음이니까.. 좀 놀란거죠. 잠깐 기다리세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윤셰프가 허둥지둥 주방으로 채비하러 떠나고, 찬 역시 놀란 얼굴로 휘둥그레 바라보며 질문한다.

"집사장님 단거 안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한번도 드시는 걸 못봤는데...."
"젤리 먹듯이, 살살 녹여 보려고."
"네에? 그게 무슨 말씀...."

놀라서 반문하는 찬의 말을 불쑥 끊고 전집사의 안주머니 안에서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찬에게 장갑 낀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며 양해의 제스쳐를 취한 전집사는 곧장 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주인이었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주인님.
아... 서류 말씀이십니까. 홍비서님이 깜빡 하셨다고요.
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마자 아직 반도 더 남은 아침 식사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망설임 없이 식탁에서 일어서는 전집사를 따라, 찬 역시 함께 일어선다.

"집사장님, 제가 대신 가져다 드릴게요. 식사 마저 하세요."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전화까지 하셨으니 제가 가야죠."
"그치만......"

저택 안팎으로 전집사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찬으로서는 평소 전집사의 수족이 되어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해왔던 만큼 이번에도 심부름 역을 자청했지만 전집사는 제가 직접 하겠다며 거절했다. 걱정이 그득 담긴 눈빛으로 입술을 오물거리는 찬의 시선이 전집사의 장갑 낀 손으로 슬그머니 향했다. 찬이 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지만, 이것 역시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전집사는 손을 들어 찬의 축 늘어진 어깨를 두드려 주는 대신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미하게 웃어 보였다.

"다녀올테니, 그동안 저택을 잘 부탁합니다."
"다..다녀오세요 집사장님..!!"

세상에 집사장님이 나한테 웃어 주셨어. 나한테 다녀오겠다고 하셨어....
허리를 90도로 꾸벅 숙여 인사한 찬은 한동안 감격에 몸을 떨었고, 전집사의 주문대로 15분만에 무지개색으로 층층이 쌓여진 수제 젤리를 만들어 온 윤셰프는 기껏 시켜놓고 이 인간 대체 어딜 갔냐며 짜증을 냈다는 후문이었다.



3.

모처럼만에 저택 밖을 나서는 전집사를 위해 차를 대기시킨 최기사는 운전하는 와중에도 백미러로 전집사의 눈치를 살피곤 했는데, 이따금씩 거울 안에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글하게 웃곤 했다. 쌍꺼풀이 진한 눈으로 서글서글 사람좋게 웃으며 백미러로 시선을 맞댄 최기사가 먼저 입을 떼었다.

"오랫만의 외출 아니십니까. 간만에 바깥 바람 쐬니까 어떠세요."
"조금.. 덥군요."
"아! 에어컨을 좀더 켜드릴까요."
"아닙니다. 어차피 곧 도착할 텐데요."
"제가 운전하는 차에 집사장님이 계시니 감회가 새롭네요. 사실 평소엔 말 한마디도 나누기 힘든 분이셨는데...."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불편한 게 아니라.. 좋은 뜻으로 말한 겁니다. 집사장님이랑 이렇게 뵈니까 좋아서요."

평소 사람 좋기로 유명한 최기사였지만 전집사 특유의 분위기를 뚫을 수는 없었는지 차 안에는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딱히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단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를 몰랐을 뿐이지만 전집사의 침묵이 무언의 거절이라 생각했는지 최기사는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왜 사람들은 제가 사과를 하면 오히려 더 불편하게 여기는 걸까.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며, 전집사는 무릎 위로 고이 올려 뒀던 서류 가방을 꺼내 다시 한번 내용물을 검토했다.

이번 회의에서 다뤄질 중요 서류였다.
각 부서 담당자들의 결재 사인이 담겨 있기에 새로 복사하거나 팩스로 부칠 수도 없는 원본을 챙기지 못하고 깜박한 홍비서는 지금쯤 몇번이고 기억도 안 날 때까지 허리숙여 사죄하고, 또 실수를 저질렀다며 시무룩해 있을 것이다.

회사 정문, 15분 전부터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홍비서는 예상대로 안절부절한 얼굴로 원본 서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전집사가 타고 온 차량을 보자마자 반 울음 반 감격으로 후다닥 달려와 뒷좌석 문을 열어 주며 연신 허리굽혀 인사한다.

"집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급하실 텐데 어서 들어가서 준비 하셔야죠."
"네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차라도 한잔 하세요,"

거의 울먹거리는 얼굴로 붙잡는 홍비서에게 '원래 남이 해주는 음식은 잘 먹지 않는다'고 거절하지 못한 전집사는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오피스로 향했다. 중요 서류를 또 분실하지 않게 품안에 소중히 꼭 끌어안고는 제가 원체 너무 덜렁거려서 이번에도 또 덜렁거리는 바람에 상무님께 누를 끼치고 집사님께도 이런 수고를 끼쳐 드려 너무 죄송하다며 시무룩하게 오물대는 홍비서는, 과연 저 사람이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원 졸업에 MBA 수료, 5개국어를 습득한 엘리트가 맞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헐렁한 구석이 있었다. 구사 가능한 5개국어 가운데 한국어를 제일 못한다는 말이 허튼 소문은 아니었는지 혀가 새는 듯한 어눌한 발음으로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홍비서에게 살짝 불편함을 느끼려는 찰나, 복도 끝에서 주인의 모습을 발견한 전집사는 금세 얼굴이 밝아졌다.

말씀하신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보고하려던 전집사는 분명 눈이 마주쳤음에도 곧장 고개를 돌려 버리는 주인을 보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주인은 지금 다른 고위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전에 없이 심각한 분위기에 전집사의 얼굴도 같이 심각해졌다가,
어-어디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집사님? 하고 나비효과 마냥 한층 더 침울해진 홍비서의 물음에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리고 홍비서에게 안내받은 대로 순순히 오피스 테이블 앞에 앉은 전집사는, 평소 자신만의 분위기가 상대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전혀 자각이 없는 듯 했다.

"상무님도 금방 오실 거예요. 그런데 뭘로 드릴까요? 차는 여덟가지 종류가 구비되어 있고 커피는 제가 직접 내리는 건데....."
"커피로 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저 커피 되게 잘 타요.
팔랑거리는 걸음으로 문을 닫고 사라진 홍비서가 흘리듯이 놓고 간 서류를, [김민규 상무] 라는 명패가 올려진 주인의 책상으로 잘 보이게 정렬해서 가져다 놓은 전집사는 신기한 눈으로 오피스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평소 저택 밖에 나오는 일이 별로 없으니 주인의 오피스에 오는 경험도 손에 꼽을 정도로 없던지라 모든 것이 신선했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 밖을 흘낏 내려다 보던 전집사는, 문득 흰 장갑을 낀 제 손도 흘낏 내려다 보았다. 좀 더러워진 듯 했다. 하지만 저택 밖에서 장갑을 벗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 사이, 오피스 문이 벌컥 열리고 주인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주인,"

큰 보폭으로 단숨에 성큼성큼 걸어온 주인은 그대로 전집사의 넥타이를 홱 끌어 당겨 입을 맞추었다. 잘 정돈되었던 넥타이가 수트 밖으로 삐질 삐져나왔지만 전집사는 파르르 떨던 눈꺼풀을 조용히 내려 감았다.

거칠게 침범하는 주인의 혀끝으로 어렴풋한 커피 내음이 났다.
아마 아침에 오피스에서 홍비서가 타 준 커피의 흔적일 터였다. 밖에서 남이 타준 커피는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이 혀끝으로는 마시고 싶었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기도로 물씬 밀려 들어오는 커피 잔향에 취할 것만 같다. 비틀거리는 전집사를 그대로 떠밀듯이 책상에 앉혀버린 주인은 느슨하게 비틀어 내린 넥타이 위로 목깃까지 잘 닫혀 있던 단추를 풀며 안쪽의 살갖을 씹었다.

"지금 여기서 벗으라면. 벗을 수 있어?"

전집사의 눈이 흔들렸다.
장갑을 벗는 것조차도 망설여졌던 그였다. 밖에서 맨살을 드러내야만 한다니. 생각만으로 이미 장갑 낀 손끝이 다달다달 떨려왔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전집사가 떨리는 손으로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냈다. 긴장으로 손에 힘이 다 빠져서 흐물거리는 데다 손가락이 너무 떨려서 몇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벨트 안으로 들어간 지점까지 셔츠 단추를 모두 풀어낸 전집사가 후들거리는 손으로 셔츠 자락을 벌려 하얀 가슴팍을 내보였다.

빈약하게 마른 살갖의 군데군데 붉은 잇자국이 빼꼼히 드러났다.
더러움이라곤 일절 알지 못할 것 같은 남자가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갖춰 입은 수트 안에 꽁꽁 감춰 두었던─ 제가 남겨 놓은 외설의 흔적이 엿보이자 주인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수치심 그득한 얼굴의 전집사가 이내 벨트마저 푸르려는 순간, 주인의 손이 손등 위로 겹쳐졌다.

"이제 됐어."
"하..할 수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하라고 하신다면. 전 무엇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어."

전집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가장 피하고 싶은 것.
전집사가 주인의 성격과 성향, 생각, 기분, 기호를 모두 파악하고 있는 만큼 주인 역시 그를 누구보다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다. 타인의 눈에는 단순한 무표정일 뿐인 전집사의 하얀 얼굴에서 기쁨, 침울, 실망, 아픔, 가장 큰 절실함과 두려움마저 모두 읽어낼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는 영역의 단 하나뿐인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기에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끝없이 시험하고, 확인받고 싶은 것 역시 그의 욕심이고, 자만이었다.

"여기는 안돼. 널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주인은 여전히 잘게 떨리는 장갑 낀 손 대신 제 손으로 직접 전집사의 셔츠 단추를 하나 하나 닫아 주었다. 누구 앞에서라도 항상 빈틈없는 모습을 보이는 전집사의 망가진 모습을 독점하길 즐기는 주인으로서는 항상 제 손으로 흐트러트렸던 전집사의 복식을 제 손으로 말끔히 정돈해 주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전집사의 흐트러진 모습을 좋아한다.
허나 그 모습을 보는 건 자신 뿐이어야만 했다. 전집사가 밖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것 만큼이나, 주인 역시 그를 함부로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다과 쟁반을 든 홍비서가 오피스로 들어왔다. 방금 내린 따끈한 커피와 함께 곁들일 버터 쿠키와 우유, 시럽이 가득 담겨 있어서 홍비서의 고심이 엿보이는 트레이였다. 노크를 하면 안에서 미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어 버리는 홍비서의 덜렁거리는 습관을 잘 알고 있던 주인은 놀라지도 않고 익숙하게 고개를 들었다. 반면 전집사 혼자만 있을 줄 알고 커피를 한 잔만 내린 홍비서는 당혹스런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상무님 오셨어요? 죄송합니다 커피를 한 잔밖에 안 가져왔는데.."
"커피는 됐고. 홍비서, 이 서류 세미나룸에 미리 가져다 놓고 회의 준비하면서 대기해."
"네, 상무님."

전집사가 미리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서류를 곧장 홍비서에게 건넨 주인은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고개 숙여 목덜미로 얼굴을 푹 묻었다. 그리고 전집사의 하얀 목에 코를 틀어 박고 그의 체취에 얼굴을 부비며, 재차 확인한다.

"커피는, 됐지?"
"네."

충분히 마셨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입술로 다시금 입을 맞추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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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김민규
전집사: 원우
윤셰프: 정한
이찬씨: 이찬
최기사: 승철
홍비서: 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