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another tequila sunrise
Starin' slowly 'cross the sky, said goodbye
1.
원우형. 저.... 진짜 형 좋아해요.
진짜…, 정말이에요.
진심으로요.
몇 번이나 강조하는 석민의 말끝이 살짝 떨려왔다.
이미
여러 지인들에게 받은 화려한 꽃다발을 품에 잔뜩 안고 선 원우에게 우물쭈물 내밀어진 싸구려 포장지의 빨간 장미꽃 한 송이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 하는 석민의 불안한 시선만큼이나 보잘것없고,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허옇게 질린 석민의 손가락을 따라 볼썽
사납게 바들거리는 장미꽃을 흘낏 내려다 본 원우는 한숨 섞인 눈빛으로 말을 잘랐다.
석민아, 넌 진짜 좋은 동생이야.
형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덧붙여지는 말은 질문 따위가 아니었다. 단호하고도 냉정한 원우의 거절에 석민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감정의 수습을 기다려줄 새도 없이 곧장 등 뒤에서 제 이름을 불러오는 누군가의 음성에 원우는 고개를 돌렸다.
네, 금방 가요!
─그리고 화들짝 고개를 든 석민의 얼굴은 당혹스러움으로 붉어져 있었다.
…형, 졸업 축하해요.
당장이라도 자리를 뜰 것 같은 상대를 붙잡아 보려 황급히 더듬더듬 내뱉어지는 말은 자칫 초라하게 들릴 만치 흔하고 상투적이라, 원우 역시 뻔한 대답을 돌려 주었을 따름이었다.
고마워,
하는 뻔하고도 식상한 말에 석민이 어떤 눈을 했었는지는─
돌아서자마자 잊어 버렸다.
그대로 받는 것조차 잊어버린 빨간 장미꽃 역시 마찬가지였다.
2.
He was just a hired hand
Workin' on the dreams he planned to try
The days go by
3.
수년 후.
원우는 바쁘고도 짜증스런 일상에 치이며 정신 없이 살아가는 재미없는 어른이 되었다.
몇 명의 사람을 만나고 사귀었지만 하나같이 끝이 좋지 않았다.
조용한
듯 하면서도 까탈스러운 구석이 있는 원우의 입맛을 하나하나 맞춰 줄 비위 좋은 상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처음엔 그런 모습조차
귀엽고 사랑스럽게 봐 주던 이들도 결국은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기를 여럿 반복하자,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게 여겨졌다. 피곤한 감정 싸움은 질색이었다.
남는 시간은 자연스레 혼자 보내게 되었다.
주말에는 혼자서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했고, 퇴근 후 자주 가는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살짝 반주를 했다. 그야말로 재미없고 우울한
어른이었다. 가끔씩 술자리에 불러내는 동기들의 연락에 응하긴 했지만, 마음을 전부 터놓을 정도로 친한 건 아니었다.
원우는 혼자였다.
재미없는 어른이 되었지만, 딱히 외로운 건 아니었다.
4.
Ev'ry night when the sun goes down
Just another lonely boy in town
5.
그날도 어김없이 단골 식당 카운터에 앉아 혼자 저녁을 때우던 참이었다.
“..원우형?”
낯선 듯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석민이었다.
원우를 보고 반가운 기색이 만연한 석민은, 권하지도 않았는데 카운터의 옆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인사말을 건네왔다.
오랜만이에요 형. 그 동안 잘 지냈어요?
붙임성 좋은 성격은 여전한지 사람 좋은 눈웃음을 지으며 살갑게 말을 붙이는 석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이다.
시큰둥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원우가 한 마디 하는 동안 네 마디씩 쏟아내더니 그새 카운터에 제 몫의 주문까지 넣은 석민은 원래 일행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굴고 있었다.
“형은 정말 그대로네요. 하나도 안 변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석민은 이제 더 이상 교복을 입은 한 학년 아래의 후배가 아니라, 멋들어진 수트를 익숙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되어
있었지만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눈웃음은 여전했다. 졸업식 후 제대로 연락 한번 닿은 적도 없었던 주제에 쓸데없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태도마저 그러했다.
옆에서 지긋이 쏟아지는 듯한 그 눈빛을 마주하며, 원우는 대답했다.
“..너도 그래.”
다행이다. 그렇게 보여서.
나지막이 대답하며 슬핏 웃어 보이던 석민이 어떤 눈을 했었는지는,
잊어 버렸다.
6.
And I couldn't keep from comin' on
It's been so long
7.
첫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따위는 이미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쏟아지듯
밀려 들어오는 석민의 혀끝에 멍해진 머리가 담배 쩐내 나는 여관 침대로 곤두박질 쳤고, 떠밀린 몸 위로 올라탄 석민의 목덜미에
팔을 둘러 감았던 듯 싶기도 했다. 술 냄새를 풀풀 풍겨대는 입술 따위에 정신 없이 매달리는 사이 입고 있던 옷가지는 형편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원우는 석민에게 전신을 내맡긴 채 끌어 안겨 있었다.
형. 원우형,
좋아해요.
진짜로, 정말 좋아해요...
달아오른 이마며 콧잔등을 따라 얼굴 구석구석 입을 맞춰오며, 석민은 속삭였다.
어른 남자의 냄새가 배인 혀로 원우를 탐닉하면서도 서툴기 짝이 없는 고백의 말을 전하는 석민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삼키며─ 원우는 조금, 짜증이 났다.
원우에게 석민은 여전히 졸업식 날의 빨간 장미꽃처럼 거추장스러웠고, 어렸다.
그럼에도 석민을 멈추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취기 때문이었다.
오랜
금욕 끝에 간신히 찾아온 살 섞임을 놓치기 싫다며 질척대는 몸뚱이는 이미 이성을 잃고 석민의 아래서 녹아 내리고 있었다. 뜨거운
뱃속으로 무겁게 들어찬 것이 약한 곳을 꾸욱, 꾸욱, 눌러 올 때마다 찡긋거리는 두 눈을 꾹 내려감은 원우는 석민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매달려 그 어깨를 앙 물어 댔다.
석민을 원했다.
석민의 단내 날 정도로 유치한 속삭임조차
열락(悅樂)을 돋구었을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다. 낡아빠진 여관 침대 스프링을 따라 느슨하게 허리를 돌리며
간헐적으로 밭은 숨을 내뱉던 원우는 제가 깨문 자국이 남은 석민의 어깨에 달아오른 눈가를 꾸욱 눌렀다.
형. 원우형,
좋아해요─
흐읏..!
바르르
요동치는 전율에 안쪽까지 꾸욱 좁혀 조이자 석민의 미간이 좁혀 일그러지며 한숨 같은 신음성을 들이 삼켰다. 절정에서 술내 풍기는
숨결로 고백하는 석민이 우스울 정도로 절절해서, 조금 짜증스럽다 못해 연민이 피어 오를 지경이라고 생각하며─ 원우는 조금,
웃었다.
8.
Tequila Sunrise, with the bloodshot eyes
My, my, my, how time flies and goes by surprise
9.
잠을 설쳤다.
간만의
성적 흥분을 맞은 몸뚱이는 취기 속에 몇 번의 절정을 맞이하자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렸지만, 익숙지 않은 침대와 자꾸 살을
부딪혀 오는 낯선 온기가 불편해서 깊이 잠들지 못했다. 한계를 넘도록 마셔댄 술 때문에 찌르르 울려대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던
데다, 자꾸 머리칼을 만져오는 성가신 손길 때문에 신경 쓰여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눈을 떠올리자 어느덧 날이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빛이 차오르는 시야로, 잠들지 않은 석민의 눈빛이 지긋이 쏟아져 내렸다.
여태
원우의 머리칼을 매만지다 예기치 못하게 맞닿은 시선에 조금 당황하던 석민은 이내 푸스스 웃어 보였다. 끔찍한 숙취 때문에 결코
표정이 좋을 리 없는 원우에게 예의 그 사람 좋은 눈웃음을 흘리며, 밤새 조금 잠긴 음성으로 다정하게 속삭여 왔다.
“일어났어요?”
난 잠이 안 와서. 형이랑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너무 떨려요.
그냥, 너무 좋다. 하하..
말갛게 웃는 석민은 꼭 새벽녘에 차오르는 햇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순간이 너무도 행복하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석민만큼이나, 원우 역시 속에서 울컥울컥 차오르는
짜증을 숨길 수가 없었다. 석민이 느끼는 일말의 떨림이나 설렘조차도 원우에게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착각하지마, 석민아.”
난 너랑 사귈 마음도 없고, 널 받아줄 생각도 전혀 없으니까.
니가 이런다고 달라질 건 없어.
원우는 다정스레 제 머리를 매만지던 손을 밀쳐내고, 석민의 품을 빠져 나와 우뚝 앉았다.
떠오르는 아침놀이 좁은 여관 창문 너머로 스며 들어와 원우의 옆얼굴을 내리 쬐었다. 끊임없이 지끈대며 울려오는 숙취도, 술 냄새 풍겨대는 입술로 고백하던 석민의 속삭임도,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한 그 눈빛도 전부 짜증스러웠다.
아무리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도무지 잊혀지질 않는 석민의 존재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서─
원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원우는 석민이 두려웠다.
석민이
제게 쏟아내는 지속적인 호의가 두려웠고, 뾰족하고 못난 제 가시마저 녹여 버리는 석민의 따듯함이 두려웠다. 석민의 치기 어린
다정함, 가감 없는 솔직함. 그 모든 것들이 낯설고 거북했다. 유치하리만치 단내 나는 석민의 감정이, 저로서는 감당이 되질
않아서.
졸업식 때 석민이 건넸던 장미꽃 한 송이처럼.
싸구려 포장지가 구깃해질 정도로 긴장과 떨림이 여실히 담겨있던 그것은, 비싸고 화려하지만 형식적인 꽃다발 속에 파묻혀 있던 원우로서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다.
원우는 그런 석민이 너무나도, 버거웠다.
10.
Take another shot of courage
Wonder why the right words never come
You just get numb
11.
“형은 정말 그대로네요. 하나도 안 변했어.”
솔직하지 못한 것도, 거짓말 못 하는 것도 똑같아.
삐걱,
원우를 따라 몸을 일으켜 앉는 석민의 무게에 낡아빠진 침대 스프링이 울먹였다. 돌아보지 않는 원우의 잘게 떨리는 마른 어깨를
내려다 보며 석민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온몸으로 티가 나는 진심을, 어떻게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
“나, 형 좋아해요. 몇 년 동안 계속 좋아했어. 형도 나 좋아하잖아. 이거 착각 아니잖아요.”
원우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보지 못 했다.
그럼에도 석민은 원우가 지금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동요를 감추고 감정을 추스르려 안간힘을 쓰는, 고집스럽지만 여린 눈. 지금까지 석민이 봐 왔던 바로 그 눈이었다. 석민은 조용히
손을 뻗어 원우의 어깨를 잡아 쥐었다. 마른 어깨가 그새 식어 있었다. 이토록 강한 척만 하는 약한 사람이라서, 도저히 안아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이젠 나 좀 믿어줘요. 제발.”
석민은 뒤에서부터 와락 끌어안은 원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차갑게 식은 어깨에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를 꾸욱 눌렀다. 볼썽 사납게 자꾸만 눈물이 나려 했다. 코끝으로 찡하게 울려오는 통각에 젖은 숨을 삼켰다. 이런 모습을 원우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 역시 석민의 고집이었다.
“석민아, 넌 진짜 좋은.....”
원우는 차마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감히 끝까지 부정하지 못하는 그 입술을 돌려세워 입을 맞추었다. 원우는 거절하지 못 했다. 거절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그대로 석민의 목덜미를 끌어 안았을 따름이었다.
벌거벗은 석민의 어깨에는 지난 밤 원우가 깨물었던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원우의 어깨에는 석민의 자국이 남았다.
잊을 수 없는,
자국이었다.
-
It's another tequila sunrise
this old world still looks the same,
Another frame.
=
생애 첫 합작 참여작.
'칵테일'이 주제였는데, 나○위키에서 칵테일 문서를 서치하던 중
좋아하던 여자에게 차인 시골 청년의 아픔을 노래하는데, 맨 처음 가사인 'It's another Tequila sunrise...'는 숙취, 칵테일, 밤새도록 술을 마신 뒤 보는 일출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을 생각하게 해주는 명곡으로 브릿지 부분의 '왜 진정으로 원하는건 이루어지지 않는걸까?'라는 가사가 백미.
↑라는 대목 보고 꽂혀서 무작정 써본 짧은 글입니다.... 정작 마셔본 적도 없는 칵테일인데 동명의 노래 설명에 엄청나게 꽂혀버려서..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 이거 딱 겸원 아니야?ㅠㅠ 하면서 엉엉 울었던 기억. '왜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이루어지지 않는걸까?' 라는 가사 대로면 사실 겸원은 끝까지 짝사랑으로만 남아야겠지만..... 오랜시간 맘고생 한 겨미에게도 해피엔딩을 주고 싶었습니다.
이 글의 원우는 제 연성의 모든 원우 중에서도 가장 겁쟁이네요. 좋아하는 감정을 인정하기도 싫어서 그냥 '짜증'과 '부담'으로만 치부해버리고 돌아봐주지 않는... 이런 겁쟁이는 그냥 술 왕창 멕여서 고주망태로 만들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술김에 한 거라고 변명하는 것까지 딱 제가 좋아하는 비겁하고 냉랭한 무심수의 모습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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