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구미호 원우 썰

iamond 2016. 1. 31. 23:11


원우는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사는 백년묵은 구미호야.
날래고 가벼운 몸으로 공중제비를 세번 돌아 사람으로 둔갑하는데, 원우처럼 오래 묵은 구미호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둔갑할 수 있지만 일부러 사내 모습으로 둔갑하는 거야. 선비들의 경계심을 늦추고 좀더 접근하기 용이하도록.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의 원우를 보며 선비들은 사내인데도 불구하고 마른 침을 꿀꺽 삼키게 되지.

"한양에 가시는 길입니까? 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야살스러운 눈꼬리로 살풋 웃는 얼굴에 이미 선비들은 반쯤 넘어온 상태야.
저 역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이라는 구실로 자연스럽게 동행하면서 과거길에 나선 젊은 선비들을 홀리는 원우.. 입에 문 여우구슬을 혀로 넘겨받으며 입을 맞추는 것으로 서서히 남정네들의 정기를 빨아먹고, 정신없이 삽입하는 남정네들이 절정에 다다를 때에 생 간을 쏙 빼먹는 거지. 젊은 사내의 생 간 백개를 먹으면 구미호 원우는 사람이 될 수 있어.

원우는 본디 사람이 되겠다는 욕심 따위 없었어.
그런데 어느날 요력이 떨어져 비루한 새끼 여우의 모습으로 변모해버린 적이 있었는데,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데다 사냥꾼이 쳐 놓은 덫에 걸려 낑낑대던 중 아랫마을에 사는 철부지 꼬마 순영이가 원우를 구해준거야.

여우야 많이 아프겠다... 하면서 꼭 안고 산을 내려와 제 방에 재워주고, 제 옷고름을 찢어 상처를 동여매주고 제 밥도 나눠주고.. 사실 원우는 그런 것 따위 먹지 않아도 요력만 채워지면 얼마든지 자력으로 회복할 수 있었지만, 너무도 지극정성으로 자기를 돌봐주는 꼬마 순영이에게 조금 감동해서 그냥 평범한 여우인척 하면서 다 나을 때까지 눌러 앉아 있었어. 그러면서 순영이와 정이 많이 들어서, 상처가 다 나아서 순영이가 산에 풀어주며 잘가 여우야! 손을 흔들어 주는데도 왠지 좀 아쉬울 정도였거든.

그래서 혹시나 순영이랑 만날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종종 여우 모습으로 산문턱을 내려와 어슬렁대다 사냥꾼에게 잡힐뻔 하거나 사나운 개들에게 내쫓길뻔한 적도 수차례였고.. 조금씩 커가는 순영이를 지켜보면서, 원우는 어느새 자신도 순영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순영이와 사람의 말로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고, 사람의 모습이 된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순영이에게 사람으로 '둔갑'한 자신을 보여줄 수는 없었어. 천성이 구미호인지라, 의도치 않게 순영이를 홀려 버리거나 순영이의 정기를 빼앗게 될까봐 두려웠던 거야..

원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젊은 사내들을 홀리고, 정기를 빼앗고, 생 간을 빼먹기를 반복했어.
헌데 그 수가 너무도 많아지다보니 이제는 마을에 소문이 만연하게 난거야. 산 문턱에 구미호가 산다더라, 젊은 사내들을 홀려 간을 빼먹는다더라... 그러다보니 점차 경계의 기색이 심해지고, 사냥꾼들이 진을 쳐서 하마터면 잡힐 뻔 하기도 하고.. 점점 상황이 힘들어지기 시작해.

그런데도 원우는 여전히 산에 오르면 자신을 찾아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순영이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는거야. 이제 거의 다 왔어. 생 간 99개를 먹었거든. 하나만 먹으면, 원우는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러기 전 마지막으로 여우로서 순영이를 만나는 거야. 여우 모습의 원우에게 제 몫의 주먹밥을 떼어 주면서, 순영이는 도란도란 말을 해.

"참, 요즘 산에 구미호가 산다고 난리더라. 어떻게 생겼을까? 그렇게 많은 사내들을 홀린걸 보면 엄청나게 예쁜 거겠지?"
"구미호는 본적 없지만, 그래도 내가 본 여우 중에선 니가 제일 예쁜거 같다."
"나참, 여우랑만 친해져서 뭘 어쩌겠다고. 예쁜 아가씨라면 또 모를까."
"그러고보니 건넛집 박씨 할머니가 중매를 서주겠다고 하시긴 했어. 얼굴도 모르는 여인네와 혼인이라니.. 썩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겠지. 나도 이젠 그럴 나이니까...."

순영이의 말을 들으면서, 원우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혼인이라니. 지금까지 순영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 순영이와 함께 지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수많은 사내들을 해쳐왔는데... 초조해진 원우는 순영이 앞에서 재주를 세번 넘고,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해. 지금까지 순영이와 보내왔던 시간들이 있으니까, 순영이라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어도 자신을 믿어줄 거라는 생각이었던 거야.

"..순영아!"

사람의 모습이 된 원우를 보며, 순영이는 경악해.
먹던 주먹밥을 떨어트리고, 기겁을 하면서 비명을 질러. 겁에 질린 순영이의 얼굴을 보며, 원우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나... 여우야. 니가 구해줬던 여우. 우린 친구잖아. 친구라고 말해줬었잖아..."
"저, 저리가! 난 너같은거 몰라!!"
"널 위해서 사람이 되고 싶었어. 사람이 되어, 너랑 말하고 싶었어. 순영아,"
"내 이름 부르지마, 이 괴물아!"

슬펐어.
순영이에게만큼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았는데..
슬픈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원우에게, 순영이는 쏘아붙였어.

"사내들을 홀리고 생간을 빼먹는다는 구미호가 바로 너지? 그런 짓을 '날 위해' 했다는 거야? 내가 언제 너한테 그딴걸 부탁한 적 있었어?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해친 괴물이 '사람'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해? 너같은 건 흉물스런 구미호일 뿐이야!!"

순영이의 일갈에 원우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어.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반박할 수 없었어. 그저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원우를 보자 순영이도 왠지 당혹스러웠어. 솔직히 소문대로 듣던 그 구미호라면, 무슨 험한 꼴을 당해도 이상할 게 없으니 죽을 걸 각오하고 모진 말을 쏟아부었던 거였거든. 헌데 원우는 그저 서글프게 울기만 해. 그 얼굴을 보니 순영이도 사람인지라, 마음이 너무 안좋아지는거야..

"....미안해, 순영아."

그리고 울면서 숲속으로 사라지는 원우의 뒷모습을 보자, 순영이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지만 차마 원우를 붙잡지는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어.


한편 원우는 이제 삶의 모든 의욕을 잃었어.
순영이와 함께 살고 싶어서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 많은 사내들을 홀려서 정기를 빼앗고 생 간을 빼 먹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졌으니까. 사람 모습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숲속을 정처없이 떠돌다가 덫에 걸려 버려서, 구미호를 소탕하러 왔던 사냥꾼 무리들에게 잡혀 버리는거야.

사냥꾼들은 꽁꽁 묶어 결박해놓은 원우를 앞에 두고 이 요망한 구미호를 불에 태워 죽여야 할지, 물에 빠트려서 죽여야 할지, 몽둥이로 패서 죽여야 할지 온갖 험한 말들을 늘어놓지만 원우는 저항하지 않아. 그저 이 한스러운 삶이 빨리 끝나주었으면 싶고, 죽기 전에 순영이 얼굴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야.

그렇게 사냥꾼들이 원우를 잡아 죽이려 할 때, 풀숲에서 화살이 날아와 사냥꾼들을 모조리 쏘아 죽여 버리는 거야. 그리고 수풀 속에서 활을 든 순영이가 나타나. 피눈물을 흘리며 묶여 있는 원우를 풀어 주면서, 순영이도 울어.

"....사람을 해쳤으니, 나도 이젠 금수만도 못한 놈이다."
"그래도 날 구해줬잖아."

니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쳐도, 넌 여전히 날 구해준 사람이야.
그렇게 울면서 서로를 꼭 끌어안는 영원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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