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원민] 입술틈

iamond 2017. 2. 12. 15:44







아. 김민규 왔냐.
인사해. 전원우라고, 내 친구.

안녕하세요.


안녕.
조용히 고개를 살짝 까딱여 보이는 그 붙임성 없는 하얀 얼굴을 보고 가장 처음으로 느꼈던 감상은, 아무리 봐도 지훈이형이랑 어울릴 만한 부류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당장 앉은 자세만 봐도 그랬다. 지훈이형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는 더 큰데 지훈이형과 눈높이를 맞추느라 굽어진 등과 늘어진 어깨는, 작은데도 꼿꼿하고 당당한 지훈이형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애초에 지훈이형이 숙소에 누굴 데려온 적도 처음이었다. 현관에 멀뚱하게 선 채로 분위기를 살피던 중 차분히 내려앉은 새카만 눈과 마주쳤다. 나름대로 예의를 차린답시고 살짝 웃으며 목례를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탐색하듯 집요한 시선이었다. 잔뜩 털을 세우고 경계하는 듯한 얼굴.

근데 왠일이냐. 오늘 숙소 비운다며.
잠깐 뭐 두고 간 게 있어서 들렀어요. 금방 나갈거...
빨리 가라.

지훈이형의 짧고 무뚝뚝한 말은 일상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등을 떠미니 오히려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훼방꾼은 꺼지라는 듯이 단호한 형의 눈빛이 짧게 쏘아지고, 아무도 없는 숙소에 처음으로 외부인을 끌어들인 형을 굳이 추궁하고 싶지도 않아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갔던 지갑을 챙기러 돌아섰다.


늦게 와라.

무심하게 인사하는 지훈이형의 손이 그 '친구'의 손을 얽어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척 넘기며 컨버스를 구겨 신었다. 나가는 문틈으로 슬쩍 보인 두 사람의 겹쳐진 옆 얼굴. 뒷덜미를 잡아 내리는 형의 작은 손과, 무기력하게 끌려 내려가는 구부정한 뒷모습.


​나는, 아무것도 못본 거다.
그래야만 했다.




*




..왔어?
다녀왔습니다....

​이젠 익숙해졌다.

형들이 숙소를 비운 날이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원우형의 존재감이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굳이 지적할 마음은 없었다. 간혹 지훈이형 대신 현관문을 열어줄 때는 조금 당혹스럽긴 해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방금 씻고 나온 게 뻔해 보이는 반나체는 사양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지만.


샤워 코롱 냄새가 풍겨오는 하얀 어깨로 물기가 뚝뚝 흐르는 젖은 머리의 원우형은 지훈이형의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평소 지훈이형 무릎 위까지 오던 까만 반바지는 하얀 허벅지가 다 드러날 데까지 올라가 있었다. 저거 어제 지훈이형이 입고 잤던 건데. 급하게 아무거나 주워 입었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화장실에서 물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지금은 지훈이형이 씻고 있는 모양이었다.


변명, 아니 하다못해 이 상황에 대한 설명 한줄이라도 덧붙이지 않는 원우형은 젖은 머리를 연신 손으로 털고 있었다. 젖은 샴푸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숙소에서 항상 쓰던 제품인데도 묘하게 생경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자꾸 눈에 밟혀서, 손목을 불쑥 잡아 끌었다. 잡혀진 손목은 보이는 것보다도 가늘었다.

드라이기로 제대로 말려요.
괜찮아. 두면 어차피 마르니까..
그러다 비듬 생긴대요.

단호한 말에 원우형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원우형을 내 방 침대에 앉혀놓고, 서랍장에서 드라이기를 꺼내 돌렸다. 습관처럼 살짝 굽어 있는 마른 등. 지훈이형에게 맞춰지는 데에 익숙해진 어깨 높이는 그 앞에 서 있는 나한테는 너무 낮아서 나까지 등을 구부리고 숙여야 했다.


위이이잉

따듯한 약풍으로 돌아가는 드라이기 바람이 닿자 발가벗은 어깨가 움찔움찔 했다. 물기 남은 머리카락이 얼굴로 찰싹찰싹 내려붙을 때마다 하얀 뺨이 꼼틀거린다.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슬며시 드러난 목덜미가 하얗다. 내려앉은 속눈썹이 파르르르 떨리는 걸 못본 척 하는 대신 애꿎은 머리칼만 매만졌다. 조심스럽게 살살 말려주고 있는데, 조용히 시선을 떨구고 있던 원우형이 문득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리 세지도 않았던 드라이기 약풍에 묻힐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자상하다고.
이런 거, 지훈이형은 해준 적 없어요?
전혀.

..걘 이런 거 안 해.
목소리는 낮았고, 차분했고, 쓸쓸했다. 물기가 옮겨 젖은 손바닥으로 쉴새없이 들이치는 약풍의 소음. 열린 문틈으로부터 샤워실 물 소리가 쏴아아아 쏟아져 내려오는 와중에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꽂히듯이 들린 음성이었다.


고개가 수그려진 만큼 가느다란 목덜미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발가벗은 하얀 어깨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끝으로 불어오는 드라이기의 뜨끈한 바람. 손가락 사이로 감겨오는 젖은 머리카락. 반쯤 마른 가닥가닥이 살랑살랑 흩날렸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긴 속눈썹. 


줄곧 조용히 내려앉아 있던 원우형의 새카만 두 눈과 마주치는 순간─

​처음부터 지훈이형의 것이었던 그 입술과 맞닿았다.
나가는 문틈으로 슬쩍 보았던 사람을 탐하며, 처음으로 '욕심'이 난 순간.


나는 어느 새 이 사람에게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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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내용과 훈원 관계성을 구상해둔게 있었는데....... 애매하게 잘린 글...

와 이것도 진짜 오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