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별사탕 (월간영원 2월호)

iamond 2017. 3. 1. 00:01

 

 

BGM :: 光の中へ

허상, 나의 별이 되어줘

 

 

 

 

 

 

벌써 일곱 번.

원우는 실패했다.

 

자조하며 소매를 걷었다. 길게 내려오는 니트 소매를 걷어 내자 이미 수 차례 그어 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질기다, 정말. 왜 그토록 끊어 내고 싶은데도 이 지독하고 끈질긴 삶生은 끝나지 않는 것인지 답답하고 원통스러웠다. 사람의 혈관이 그토록 질긴 것인지, 몇 번씩 잘라 내도 또 다시 살아 남는 제 명이 질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이야말로 끝을 보고야 말 것이다.

 

원우는 옥상 난간을 향해 섰다.

 

사람이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는 11미터 아래의 경치는 황홀할 만큼 짜릿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난간을 넘어 바깥으로 섰다. 좁은 바닥을 간신히 디디며 난생 처음 제 몸이 얇고 가볍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생애 마지막으로 보는 하늘은 쓸데없이 푸르딩딩 하고, 구름은 기분 나쁠 정도로 뿌옇다. 부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마지막이 되길 바라며. 녹슨 난간을 부여 잡은 손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안돼!’

 

환청인가.

 

일순 움찔한 어깨를 내리며 원우는 자조했다. 지금 제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뿐더러, 제가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도 아무도 없다. 곧 무너질 폐 건물을 수소문한 끝에 찾아낸 보물 같은 장소가 아니던가. 전기가 끊긴지 오래 되어 귀신이라도 나올 법한 어두침침한 복도를 휴대폰 플래쉬로 비춰 가며 간신히 들어온 옥상이다. 누가 이렇게 불러 댄단 말인가. 귀신이 아니고서야.

 

………귀신?

 

, 으아악!”

 

원우는 느닷없이 제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 민 어떤 남자를 보고 그만 비명을 질렀다.

 

여긴 옥상 난간 바깥쪽이다. 밑에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경악하던 것도 잠시, 원우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 어차피 죽고 싶어서 안달 난 놈인데 귀신이 보인다면 오히려 잘된 것 아닌가. 마지막 가는 길에 길동무라도 만나면 외롭지는 않을 거다. 곁에 누구라도 있어 주는 임종이라니, 오히려 살아 있을 때보다 나은 듯도 싶었다.

 

안돼. 죽지마, 원우야.”

 

남자가 말했다.

11미터 위 상공으로 둥둥 떠 있는 남자가, 제 이름을 불렀다.

원우는 가느다란 눈끝을 찡그리며 물었다.

 

당신, 누구야?”

 

남자는 대답했다.

 

“....난 너의, 수호 천사야.”

 

 

 

 

 

별사탕

iamond

 

 

 

 

 

“....그러니까 지금까지 전부, 네가 그랬다고? 끊어 놓은 내 동맥을 붙여 놓고, 한 통 다 털어 먹은 수면제를 해독시키고, 목 매단 줄 매듭을 풀어놓고?”

, 맞아.”

 

뻔뻔스레 대답하는 남자의 모습에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양껏 치켜 올라간 눈꼬리로 살살 웃어 대는 꼴을 보아 원우가 제 말을 들어 준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쁜 듯한 이 남자는, 지금까지 숱하게 시도했던 원우의 자살을 방해한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단지 자신이 원우의 수호 천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안 나오는 지경이었다.

 

..웃기지마! 천사 좋아하시네, 날개도 없는 주제에-”

보여줄까?”

 

질끈 눈을 감은 남자가 끙차, 하고 기합을 주자 견갑골을 따라 어깨 너머로 손바닥 만한 작은 날개가 뿅 튀어 나온다. 당황한 원우가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였다. ...말도 안 돼. 이건 눈속임이야. CG라고! 당혹스럽게 손을 뻗어 보았지만 정작 손으로 와 닿는 것은 사람의 체온처럼 따듯한 온기와 보송보송하고 하얀 깃털이었다. 그리고 원우의 손길이 닿자마자 까무러치게 놀라며 어깨를 움츠린 남자는 날개를 푸드덕 댔다.

 

크흐, 간지러워.”

이거.. 진짜야? 진짜 날개 맞아?”

그렇대두. 자꾸 그렇게 만지지마, 기합이 풀려 버리니까.. 난 아직 견습이거든.”

 

뿅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날개를 감춘 남자는 조금 당당해진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가늘게 휘어지는 눈웃음은 분명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어딘가 눈에 익은 느낌이 들었다. 하얀 박스티에 하얀 바지를 입은 남자의 맨발은 여전히 땅 위로 떠 있어서, 원우보다 키가 작았음에도 원우의 눈높이를 웃도는 위치에서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나마 날개가 있으니까 천사라는 주장이 가능한 거지, 실제로는 허연 소복을 입은 귀신이나 다를 것이 뭐 있나 싶은 원우였지만 딴지를 걸기도 조금 지치는 기분에 그만두었다.

 

내 이름은 호시. 너를 지키러 온 천사야.”

나를 왜 지켜야 되는데?”

너를 지키는 게 내 사명이니까...”

난 죽고 싶어.”

그럴 순 없어.”

! 니가 뭔데! 왜 내 맘대로 죽지도 못 하게 하냐구!”

 

원우의 일갈에 호시는 곤란한 얼굴로 왼쪽 가슴팍을 매만졌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호시가 꺼낸 것은 코르크 마개로 입구가 봉인된 유리병이었다. 절반보다 적은 정도로 채워 진 별사탕이 형형색색 빛나고 있는 유리병을 두 손으로 소중히 움켜 쥔 호시가 말했다.

 

내가 너를 지킬 때마다 이 유리병에 별사탕이 하나씩 채워 지게 돼. 별사탕을 유리병 가득 채우면 나는 완전한 천사가 될 수 있어. 근데 이걸 채우기 전에 네가 죽으면 나는 소멸되어 버리거든..”

 

어이가 없다.

 

결국 저 천사인지 귀신인지 모를 자식의 이기적인 고집 때문에 이 끔찍한 세상을 계속 살아야 된다는 건가? 그리고 저놈 자식이 진짜 수호 천사라면, 그 동안 원우가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순간마다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원우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하며, 호시가 떨리는 음성으로 애원했다.

 

부탁이야. 내가 널 지킬 수 있게 해 줘.”

난 죽고 싶어.”

이 병을 다 채우면, 그땐 네 소원을 들어 줄게.”

 

호시의 입술이 다부지게 다물어 졌다.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던 원우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뜨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 천사.”

호시. 호시라니까!”

네 이름이 뭐던 간에. 자꾸 그렇게 계속 따라올 거야?”

그 동안에도 난 계속 네 곁에 있었어. 눈에 안 보였을 뿐이지.”

 

호시의 대꾸에 홱 돌아본 원우가 찢어지게 째려 보았다.

 

그 흉흉한 눈빛에 근처에서 아이스크림을 들고 공원을 걷던 다섯 살배기 여자 아이가 으앙 울음을 터트리며 쪼르르 도망쳤지만, 전혀 굴하지 않은 호시는 담담하게 원우의 시선을 마주했다. 하얀 옷 한 겹에 맨발로 원우의 뒤만 둥둥 따라오던 호시는 춥지도 않은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었다. 계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의 수상쩍은 남자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디다 알리지도 못 한다는 것이 못내 한스러울 뿐인 원우는 부글부글 끓는 제 속을 알지도 못 하는 어린 꼬마들이 천진스럽게 노는 소리를 뒤로 하고 뾰족하게 쏘아 붙였다.

 

, 그러셔? 그럼 계속 안 보이게 해 줄래? 내 눈앞에서 좀 꺼지라고!”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어차피 니 옆에 있을 건데 뭐.”

이런 거지 같은...”

맘대로 욕 해. 그래도 난 너한테 꼭 붙어 다닐 거야.”

 

맘대로 욕 하라는 말에 진심으로 상스러운 욕설을 한 바가지 쏟아 내려는 원우에게, 저쪽에서 누군가가 잘못 친 야구공이 휘익 날아왔다. 두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호시가 원우의 머리를 와락 감싸고 끌어안았다. 호시의 등에 맞은 야구공은 타격 없이 그대로 데구르 굴러 떨어졌고,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원우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한 어린 아이가 얼른 공을 주워 갔다.

 

그러고서도 여전히 원우를 꼭 끌어안은 호시의 품은 지나칠 정도로 따듯하고, 포근하다. 처음 그 날개를 만졌던 순간과 같은 그 보드라움이 전신을 감싸는 감각은 지금껏 원우가 단 한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향수鄕愁── 그래, 이것은 그리움이다. 목구멍이 꿈틀거렸다. 토할 것만 같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차마 더는 감당할 수 없어진 나머지 황급히 호시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원우는 간신히 밀쳐 냈다.

 

아야! 구해 준 사람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 누가 구해 달랬어? 어차피 너 좋은 일 아니냐고 이거.”

방금 꺼로 별사탕이 하나 쌓이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해.”

싫으면 구해 주지 마. 날아오는 공이라도 맞고 뇌진탕으로 죽어 버리게.”

못 됐다 증말....”

 

가느다란 눈을 흘겨 뜨던 호시가, 까만 머리카락 새로 얼핏 보이는 원우의 귀 끝이 붉어진 것을 보고 제 두 손을 호오 불더니 원우의 귀를 손으로 꼭 감싸 주었다. 화들짝 놀란 원우가 버둥거렸지만 얼른 원우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이로 훌쩍 날아오른 호시가 따듯한 손으로 원우의 귓바퀴를 만져 주며 속삭였다.

 

가만 있어, 추워서 귀가 다 얼었잖아.”

하지마. 하지 말라고!”

얼굴도 새빨개진 것 좀 봐. 엄청 추운 가보다 너.”

아 진짜! 죽여 버린다!”

하하. 인간은 천사 못 죽여.”

 

넉살 좋게 웃으며 호시는 원우의 윗통수로 턱을 기댔다.

견갑골에서 뿅 돋아난 작은 날개가 퍼덕거리며 원우의 걸음 걸음마다 따라 날았다.

 

성가셔 죽겠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끝내 뿌리치지는 못한 원우였다.

 

 

 

 

 

*

 

 

 

 

 

 

결국 집까지 따라 들어온 호시에게,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면 정말로 죽을 줄 알라며 엄포를 놓고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원우는 잠시 샤워하러 들어갔다.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호시였지만, 오늘 원우에게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이미 원우의 알몸 같은 건 속속들이 본 지 오래다. 허나 사실대로 말하면 영원히 문전박대 당할 것 같아 눈치껏 침묵을 지키기로 한 호시는 기다리는 동안 원우의 방 책상에 다닥다닥 놓인 액자를 쭉 감상했다.

 

액자에 꽂힌 사진은 전부 원우의 독사진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시작해서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때까지 모두 원우 혼자 찍힌 사진 밖에는 없었다. 혼자서 시소를 타는 어린 원우, 운동회 때 청군 머리띠를 질끈 매고 브이자를 그리는 원우, 중학교 졸업장을 들고 꽃다발을 안은 원우, 벚나무가 흐드러지게 핀 교정에 혼자 서 있는 원우. 누군가가 찍어 주었음이 분명한 앵글임에도 사진 속 원우는 혼자였다.

 

한참을 가만히 사진만 보던 호시의 뒤로 젖은 머리의 원우가 들어왔다.

호시의 시선의 끝을 눈치 챈 원우가 무심히 머리를 털었다.

 

혼자였어. 어렸을 때부터 계속.”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원우는 호시를 보지 않았다.

 

물기 젖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서 있을 뿐이었다. 수건을 터는 원우의 손 위로 호시의 손이 겹쳐졌다. 그 날개를 만져 보았을 때와 같은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 사람도 아닌 주제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람도 아닌 주제에 사람의 체온과 같은 손으로 저를 만져 오는 이 남자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얄궂게 느껴 지는 순간이었다.

 

혼자가…… 아니야.”

“........”

“…내가, 있잖아..”

 

드디어 호시의 눈을 마주한 원우가 피식 웃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는 주제에 꼭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는 게 웃겨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넌 혼자가 아니었어.”

 

오래 전부터.

 

그리고 와락 끌어 안는 호시에게 붙들려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그 와중에 바닥으로 부딪히지 않도록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주는 호시를 보고, 원우는 웃었다. 코 앞까지 얼굴이 다가와도 숨이 닿지 않는 호시의 목덜미로 팔을 두르며.

 

원우는,

입을 맞추었다.

 

 

 

 

*

 

 

 

 

 

..... 죽고, 싶냐고?

글쎄. 더 이상 살기가 싫어서.

왜 살기가 싫냐면.... 그렇게 물어 보니까 뭐라 대답해야 할 지를 모르겠네.

 

몰라. 살고 싶지가 않아져서.

아 결국 똑같은 말인가?

 

그럼,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 버려서.

 

그래. 그걸로 하자.

 

 

 

 

*

 

 

 

 

 

죽었다.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머릿 속으로 강하게 들었던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원우’.

 

우리 원우, 어떡하지.

 

원우 혼자 두고 가면 난 어떡하지.

떠나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원우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늘의 문 앞에 다다라서도 머릿 속에는 그 생각 밖에 없었다.

하얀 베일을 두른 심판관 앞에서 입 밖으로 가장 먼저 꺼낸 말 역시 바로 그것이었다.

 

못 갑니다.’

 

원우 혼자 두고, 이렇게 갈 수 없습니다.

아직 저는 죽을 수 없습니다.

원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물었다.

 

그 아이가 네게 그렇게 소중하느냐.

네가 아직 저 곳으로 가지 못하는 이유가 진정 그 아이 때문이느냐.

그 아이를 위해서,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대답하였다.

 

무엇이든지.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신이 말했다.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

이 병에 별사탕을 가득 채워 오면 진정으로 네가 바라는 한 가지를 들어 주겠다.

 

대신 너의 존재는 살아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잊혀지게 될 것이다.

네가 그토록 원하는 그 아이는 너를 기억할 수 없고, 너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을 잊게 될 것이다.

 

별사탕을 채우기 전 그 아이가 목숨을 잃는다면 네 영혼은 영원히 소멸된다.

그래도 하겠느냐.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호시星가 되었다.

신이 앗아간 심장 대신 별사탕을 가슴에 품고,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의 곁으로 돌아 왔다.

 

 

 

 

 

*

 

 

 

 

 

무언가 아주 소중한 것을 잃은 기분이야.

그게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걸 잃은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고,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아서.

 

그래서...... 죽고, 싶어.

 

잠에 취한 원우의 가라앉은 음성을 들으며 호시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제 품에 안긴 원우의 머리를 손으로 쓸어 주다가, 스르륵 감긴 속눈썹 위로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끝이 푸석하게 마른 머리카락이며, 하얗게 튼 얼굴이며, 하도 잡아 뜯어 붉게 마른 입술이며, 아무렇게나 물어 뜯어 짧고 울퉁불퉁한 손톱까지도. 원우는 원우였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내 사람. 원우.

 

날이 어두워 질 때까지 종일 온 동네를 같이 쏘다녔던 어린 원우, 제가 탔던 시소의 반대쪽에 탔던 원우, 백군 머리띠를 맨 제 옆에 청군 머리띠를 매고 있던 원우, 같은 날 중학교 졸업장을 품에 안았던 원우, 벚나무가 흐드러지게 핀 교정에서 입을 맞추었던 원우. 그 모든 사진 속에서 지워 진 존재가 되었지만 호시는 아직도 원우를 품에서 놓을 수 없었다.

 

원우야.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 해도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죽지마, 원우야.

 

네 기억 속의 나는 전부 지워져도

나는 네가 지워지지 않길 바라니까.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못 하게 된 호시의 가슴으로, 별사탕이 소리 없이 쌓였다.

 

 

 

 

 

*

 

 

 

 

 

“..얼만큼 모였어?”

“얼마 안 남았어.”

 

원우의 성화에 마지 못해 왼쪽 가슴에서 유리병을 꺼낸 호시가 별사탕을 보여 주었다. 형형색색으로 반짝이는 별사탕이 병목까지 차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만족한 웃음을 띄운 원우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신호등의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아직 차가운 2월의 바람이 새카만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던 호시에게, 원우가 물었다.

 

“그거 다 채우면 넌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 소원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네 소원은 뭔데?”

 

내 소원은.......

호시는 입을 다물었다. 원우는 아무것도 알지 못 한다. 존재도, 추억도, 감정도 기억하지 못 하는 옛 연인戀人에게── 대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했어야 좋을까. 대답하지 못 하는 호시를 뒤에 두고 원우는 앞으로 나아갔다.

길을 건넌다.

 

대형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쾅──!!! 

 

부딪혔다. 부딪힌 것은, 호시였다. 호시는 원우를 감싸 안고 도로를 굴렀다. 챙그랑, 호시의 손에 들려 있던 유리병이 깨졌다. 병목을 채울 만큼 가득 들어 있던 별사탕이 와르르 쏟아지고 아스팔트 도로 위에 나뒹군 호시는 몸을 일으키지 못 했다. 파슥, 햇빛에 닿은 별사탕이 하나 둘 씩 비눗방울 터지 듯 녹아가기 시작했다.

 

크게 흡뜨인 원우의 눈이 오열했다.

원우는 쓰러진 호시의 몸을 끌어 안고, 머릿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을 불렀다.

 

“순영아…!!”

 

순영아. 순영아. 순영아.

잊혀졌던 제 이름을 부르는 원우의 음성에 호시의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제 뺨을 매만지는 원우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쳐 잡으며 호시는 웃었다. 다시는 듣지 못 하게 될 줄 알았다. 다시는 불러주지 않을 줄 알았다. 제 이름을 불러주는 원우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워서, 호시는 웃었다.

 

원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별사탕이 하나 하나 녹으며 사라졌던 기억들이 하나 하나 원우에게로 돌아왔다. 잊고 있던 순영의 기억이 제 곁에 다시 돌아 온 호시의 모습으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렸다. 순영은 죽었다. 건널목에 서 있는 순영에게로 웃으며 뛰어 오다 트럭에 치일 뻔한 원우를 감싸고, 죽었다. 제 품에서 새빨간 피를 흘리며 죽어간 순영의 기억이 떠올라 원우는 오열했다.

 

“안돼... 안돼..! 제발 죽지마, 죽으면 안돼 순영아...!!”

 

그래.

그 말 때문에 끝내 죽지 못 했어, 원우야.

도저히 너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너를 떠날 수가 없어서.

다시 너에게, 돌아오고 싶었어.

 

호시는 제 뺨을 매만지는 원우의 손등을 겹쳐 쥐었다.

원우가 흘린 눈물이 호시의 뺨으로 똑 떨어져 흘러 내렸다. 호시는 웃고 있었지만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하던 원우를 위로하던 그 때의 눈과 같았다. 호시의 뺨에서 떨어진 눈물이 원우를 적셨다. 땅에 떨어진 별사탕이 녹아 갔다. 새빨간 피 대신 흐드러지게 반짝이는 별사탕이 내리 깔린 땅 위에 누운 호시는 원우에게 고백했다.

 

“사랑해, 원우야.”

 

내 소원은..... 네가 행복해지는 거야.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자살 같은 거.. 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서.....

 

“네가 없으면 난 영원히 행복할 수 없어.”

 

사랑해, 순영아.

마지막 순간까지 제 행복을 비는 연인에게─

원우는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파슥, 마지막 별사탕이 녹았다.

 

 

 

 

*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입술이 떨어지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호시는 여전히 원우의 품 안에 남아 있었다.

원우와 호시는 조용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미처 상황 파악이 끝나기도 전에 빠앙─!!!, 귀청 떨어지게 큰 클락션 소리가 울렸다.

 

“이봐요! 언제까지 거기 누워있을 거요!? 길 막힌 거 안 보여?”

“왠 남자 둘이 대낮부터 저러고 있대?”

“몰라 무슨 영화라도 찍나...”

“어디 정신 병원에서 탈출한 거 아냐?”

 

주위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하얀 박스티와 하얀 바지를 입은 맨발의 호시는 도로 한 가운데에 벌러덩 누워 있고 원우는 그런 호시를 끌어 안고 오열하던 상황이다. 눈치 빠르게 후다닥 몸을 일으킨 호시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허리 숙여 사죄하며 얼른 원우의 손목을 끌고 자리를 비켰다. 영문도 모르고 일단 끌려 나온 원우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눈을 뎅그랗게 뜨고 호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추워! 발 시려!”

 

2월에 코트 하나 걸치지 않은 차림새는 둘째 치고 맨발로 길거리 한 가운데에 내던져진 꼴이니 춥지 않을 리가 없다. 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넣고 팔짱을 낀 호시가 추워서 맨발로 펄쩍펄쩍 뛰자 차분하게 코트를 벗은 원우가 호시에게 걸쳐 주었다. 그리고 두르고 있던 목도리도 풀어 내리려고 하자, 이번엔 호시가 원우를 막는다.

 

“그럼 니가 춥잖아.”

“난 괜찮아.”

“바보야, 그러다 감기 걸려.”

“이게 누구보고 바보래? 너야말로 지금 니가 어떤 꼴인지 몰라서 그래!”

 

그렇게 목도리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 하던 원우와 호시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고, 웃었다.

그리고 와락 끌어 안는다. 2월의 찬 바람에 그새 차게 식은 호시의 발간 뺨이 얼어 있는 것에 안도하며 원우는 웃었다. 손에 들고 있던 목도리를 호시에게 꽁꽁 둘러 준 원우는 결의에 찬 얼굴로 당당하게 등을 내밀었다.

 

“신발 사러 가자. 업혀!”

“야 니가 날 어떻게 업어,”

“아 잔말 말고 빨랑.”

 

결국 고집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업히고 말았다.

목도리 대신 제 팔을 원우의 목덜미로 둘러 안은 호시는 낮게 볼멘소리를 했다.

 

“신도 참 무심하시다. 이왕 살려줄 거 겨울옷 좀 입혀 주시지.”

“헛소리 하지마. 살려주신 게 어디야.”

“하긴 그래.”

 

발개진 귓가로 뺨을 부벼 오는 호시에게서 더운 숨이 난다.

그 사실이 너무도 기뻐서 원우는 웃었다.

 

“근데 너, 어떻게 살아난 거야?”

“별사탕이 거의 차 있었잖아. 아마 내가 너를 구하는 순간에 병이 꽉 채워진 것 같아.”

“그래서 소원이 이뤄진건가.”

“어. 내 평생 전원우한테 그렇게 감동적인 말 처음 들어 봤다.”

“야 그건..! 그 순간에는, 엄청 간절했으니까...”

“‘사랑해, 순영아.’ 캬~~~ 영원히 못 잊을 거야. 눈물 콧물 펑펑 쏟아내는 전원우의 고백.”

“아씨 자꾸 그럴거면 내려 너!”

“못 내리지롱~ 니가 먼저 업히라며!”

“아 겁나 무거워 권순영.”

“그것이 바로 삶의 무게란다.”

 

코트 밖으로 삐져나온 호시의 맨발이 경쾌하게 까딱거렸다.

후들거리는 얇은 다리로도 꿋꿋하게 걸어 가는 원우의 목덜미를 꼬옥 감싸 안은 호시가 얼어서 발개진 귓가에 속삭인다. 사랑해, 원우야. 뒷목까지 벌개진 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도 그래.

 

 

 

 

 

 

=

원래 의도했던 브금 사카모토 마야의 공기와 별인데

이 곡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고 ㅠㅠ

아쉬운 마음에 가사라도 포스팅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브금을 바꾸었다

 

그리구 이건 월간에 냈던 후기

 

월간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제 구상대로 나온 글을 올릴 수 있어 기쁩니다....ㅠ 복선과 떡밥이 무사 회수되어 만족스럽네요.. 2월 주제가 공개되고 어떤 글을 쓸까 생각하면서 밤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문득 생각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글을 쓰던 중 뮤직 플레이어를 틀었는데 우연찮게 흘러 나온 사카모토 마야의 '공기의 별'을 듣고 아 이거구나 싶더군요. 평소 BGM을 고를 때 가사가 없는 곡을 선호하는 편인데 이 곡은 가사가 정말 딱 맞아 떨어져서요.. 글을 읽으실 때 같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별사탕>은 제가 쓴 글 중에서도 꽤 일본 만화 풍으로 해석된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굳이 집자면 클램프의 만화를 떠올렸거든요. 존재의 기억이 소거되는 건 츠바사 크로니클, 착한 일을 할 때마다 별사탕을 모으는 건 코바토에서 착안했습니다. 별사탕을 하나하나 모으는 과정도 좀더 쓰고 싶었지만 그럼 장편 연재가 되어 버렸겠죠^^; 작중에서 원우가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이유는 호시가 죽었기 때문이지만, 원우에게서 호시의 존재가 지워져 버렸기에 자신이 왜 죽고 싶어하는지 이유조차도 모른 채 막연히 죽으려고 하는 거고. 호시는 원우가 죽지 않도록 끊임없이 살려내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은 호시가 손으로 원우 귀를 감싸 주면서 날개로 퍼덕거리는 씬이었네요. 호시의 날개가 손바닥만하게 작은 건 정말 모에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ㅠㅠ) 원우가 호시를 업고 가는 마지막 장면에 좋은 대비가 되어서 더 마음에 듭니다. 개그와 시리어스, 러브와 하트브레이킹이 공존하는 글이라 새롭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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